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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실, 캔버스가 창문을 가려 불을 켜지 않으면 사물의 윤곽을 금방 알아내기 어렵다. 물론 윤곽은 진실을 잠시 가리고 있다. 불필요한 추적이다.

언뜻 소슬바람이 들이쳤다. 길을 찾으려 주위를 휘청거리는 마음으로 돌아본다. 아마… 지나가는 바람이 화실의 지붕에 발을 헛디뎠나보다. 늘 미완의 작품들이 낮은 포복으로 공격해 오고… 방어의 자세를 취하기 전에, 속절없이… 소리를… 들으려 하고, 아쉬워하고, 혹은 그리워한다. (다름 아닌 스승님의 소리)

화실의 한 쪽엔 지금은 바래어 말린 무화과 열매 같은 빛의 장농이 두 개 있다 강 국진 스승님이 쓰시던 사물함 두 개. 아, 나는 기억 해 낸다. 그림을 그리는 일이 그림과 화해하지 않으려고 애쓰던 일이었고 그 나날들 속에 강요나 억지 없이 개입해 주셨던 스승님에 대한 기억들…
발 끝부터 싸아하게 아파오던 치열한 삶, 어느 겨울의 중심에 무작정 소래 포구로 간 적이 있었다. 저물어가는 저녁을 기다리며, 소박한 그림을 기다리며, 빈 속을 헤집는 소주를 가급적 정서적으로 마시려 노력했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서… 나에게 따뜻한 마음 한 잔 주지 않는 기다림을 위해 우주의 한 복판인 듯 막막하게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서쪽으로 기울며 나를 황홀하게 하던 금빛 찬란한 햇살. 나는 참 아름다움에 가슴 벅차 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짧은 순간. 해가 저물자 드러난 검은 갯벌의 흉한 가슴에 무척 당황했다. 편지를 썼다. 그림은 빛이 갯벌을 잠시 희롱하듯 착각하고 기만이고 과시이며 허위고 사기가 아닌가요, 스승님, 아무 대답도 없이 개강이 되었다. 어두운 복도를 따라 고개 숙이고 실기실로 가다 스승님을 만났다. "두습아" (스승님은 늘 이렇게 부르셨다. ) 잠시지만 길게 느껴지는 스승님의 넉넉한 미소… 다른 날의 웃음과는 분명히 틀리게 무언가를 던져 놓으시고 스승님은 퇴근하셨다. (그날, 우주의 질서를 확인하지 못하고 바다를 소극적으로 느꼈을 뿐인, 미시적 존재인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가를 컴컴한 실기실에서 깨달았다. )
<무제>, 23x40cm, 종이에 유채

이근명과 윤명식과 나는 공동으로 한 공간에서 그림을 그린다. 가끔씩 스승님을 공동으로 추억한다.
이근명은 이렇게 이야기 한다. "스승님은 잔디야"
윤명식은 그냥 웃는다.
윤명식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봄 볕이죠"
이근명은 그냥 웃는다.

스승님께선 하산곡리에 손수 집을 지으시며 퇴근길에 가끔 포니 자동차에 태워 데려 가시곤 했다. 어느 날인가 논 길을 따라 달리시다가 문을 여시며 "개구리 소리 들어봐라" 이렇듯 스승님은 자연과 가까웠던 분이셨다. 물 흐르듯 사시는‥‥ 우리를 민들레로 만들어 밟아도 죽지 않는 생명력을 주신‥‥ 스승님.

멀리서 희미하게 웃으시며 항상 뒤돌아 보아도 그 곳이신 스승님께선 꽃에 대해선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림에 대해서도, 논리, 사상, 예술혼, 작가정신, 열정, 시각에 대해서도…늘… 모든 것이 침묵이셨다.
다만 웃음이셨고, 따뜻한 괄호 밖의 이야기였고, 우리가 술먹고 까불어도, 발 동동 구르며 울음을 터뜨려도 웃음으로 안아 주셨다.정서를 불안케 하는 피사의 사탑으로 기대어도, 아메바의 무지, 짚신벌레의 징그러움으로 칭얼대도 웃음으로 손을 잡아 주셨다. 스승님께선… 그러면서도 세계에 대한 논리와 감각을 가끔 지워 주셨고, 더 나은 감각을 스스로 충만토록 배려해 주신 스승님.

이제 그리움의 언덕을 넘어 다시 오시지 않을 선생님이 우리에게 던져진 몫이 무엇인지 안다 "얘야, 서두르지 마라."

말 할 수 없는 것. -예술- 에 대해선 침묵하시며 진정한 자유를 획득하는 방법을 말없이 일러 주셨다.


우리는 이러한 스승님의 가르침에 동의한다. 지금은 옆에 계시지 않지만 그곳에서 웃고 계실 스승님.
우리는… 우리는 스승님의 가르침에 의해 언젠가는 하늘을 홀리는 꽃이 되리라.

- 이두섭(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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