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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그분을 만난 곳은 화가들이 모이는 장소이거나 화랑에서는 아니었다. 전혀 그림과 무관한 골프 연습장에서였다. 우리는 대학의 선,후배 사이였고 같이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었지만 전공도 다르고 움직이는 테두리도 달랐다. 그러나, 나는 그분의 이름을 익히 알고 있었고, 그분의 그림도 알고 있었다.
내가 그분의 죽음을 안 것은 장례식도 끝난 며칠 뒤였다.
3월이었지만 아직은 날씨가 쌀쌀한 초봄이었다.
봄이면 같이 필드에 나갈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그런 날을 기다리고 있었던 때였다.
나는 "악"하고 주저 앉았다. 장수를 기원해야 하는 그런 노인의 나이가 아니었다. 그저 살아가는 과정의 나이였다. 더구나 건강하고 어디에서 배어 나오는지는 모르지만 믿음의 무게가 있는 분이었다.
<무제>, 1982, 22.5x30cm, 수채화
우리가 마지막 만났던 날은 날씨가 화창했지만 바람이 불 적마다 낙엽이 마른 소리를 내며 구르던 늦가을 날이었는데, 그날의 모임은 하 인두 선생님의 그림비 제막식 날이었고 그날이 그분과의 마지막 날이 되리라는 것은 생각해 보지도 못했었다. 그날의 모든 일들을 그분이 주관했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마당에 펼쳐진 음식상에서 그분이 나를 불렀다.
"이 선생! 이 선생!" 내가 돌아보자
"이리 와, 이리 앉아." 하며 옆자리를 쓸어내었다. 그리곤 종이 컵에 맥주를 따라주며 주변 사람에게 나를 소개했다. "내 후밴데 동양화를 해. 그림이 아주 좋아 아주 열심히 한다구." 같이 모여 본 일이 없지만 낯익은 선,후배들이 같이 앉아 있었다. "골프 안 가세요?" 가야지, 봄이되면 가자구." "그리구요. 저는 오늘이 부러워요. 하 선생님은 강 선생님 같은 분이 계셔서 오늘처럼 좋은 일이 있는데. 우리 할아버지 생각하면 속상해요. 이렇게 하는 사람도 없고 저는 힘도 안되고, 저의 할아버지께서도 이런 기념관이 있어야 될 분인데. "
"그래 내가 해 줄께. 같이 해." 나는 그 약속을 믿고 있었다.
내가 한 두 달 먼저 골프를 시작했고, 그분은 동료 후배들이랑 조금 늦게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 중 몇 안 되는 화가들이라 우리가 연습하는 시간은 정해져 있었다. 그래서 매일 같이 연습하게 되었다. 차츰 친해 지면서 나는 몸무게만큼 가볍게 까불었고 그분은 미소로 내 노는 꼴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못 견디게 우스우면 "쿡쿡" 웃었다. 언제나 그랬다. 그리고 열심히 듣고 보는 눈치였다. 내 행동과 말은 그대로 그의 아내 황양자씨에게 전해졌고 그의 아내를 처음 본 날 나는 그것을 알았다. 그분의 아내는 나를 소개 받자마자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 나는 미금시 시장님과 나의 아이디어로 일을 꾸미는 게 있었다. 시장님이 나의 아이디어를 좋게 생각하여 그일을 추진하게 되었는데 한번도 체제가 갖춰진 곳에서 일 해본 일이 없는 나는 그냥 어쩌나 막연해 있을 때였다. 나는 강선생님께 의논을 하였고, 가만히 듣고 있던 그분은 아주 좋은 일이라며 그것을 추진하겠다고 했다. 그분이 대표를 맡았다. 그리고 그날부터 그 일은 진행되기 시작했다.
우리가 추진하던 일은 미금시 안에 '미술인 마을'을 만드는 일이었다. 나는 미금 시청의 일을 보았고 그분은 화가들의 일을 보았다. 날이 갈수록 그 일은 진척이 잘 되어갔고 우리는 그 희망에 가슴이 설레였다. 그 동안 우리는 모임을 많이 가졌다. 회의가 끝나면 같이 식사를 하였고 가끔은 뒷풀이로 촌구석 술집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시간도 가졌었다.
작가 강국진
그분은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남이 즐기는 것을 말없이 즐겼다. 참여하지는 않았어도 계속 술잔을 기울이며. 우리는 높은 산자락 밑 한 옆에 개울을 낀 아늑한 긴 땅을 우리의 땅이라 정했고 잠시 귀국한 M.I.T. 건축과를 나온 내 동생이 설계 도면 작업을 했다. 모든 것은 완벽했다.
당시의 문화부 장관님도 우리의 일에 협조를 아끼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 일은 이상한 곳에서 끝이나 버렸다. 수해가 일어났고, 미금시장은 그 수해에 대한 대책 논의를 계속해야 할 입장에 있었다. 우리의 꿈이 이루어질 찰나 모든 일은 삐뚜로 나가고 있었다. 마침내 우리는 그 일을 포기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루어 놓을 수 있던 꿈을 그분이 못 이룬 것에 대한 미련이 남는다.
나는 그분의 아내에게 밥을 사 주고 싶어했다. 하필이면 왜 밥인가. 나라면 밥을 안 먹을 것이다 라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49제 때 본 그녀의 눈은 눈물에 빠져 있어 부어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또 밥을 사주고 싶어했다.그러나 나는 그녀에게 전화도 하지 못하였다. 그녀가 갖고 있는 전화번호가 강선생님댁 전화번호 임엔 틀림이 없을텐데 나는 그분은 이사를 했고 그분의 아내도 따라 이사했을 것이라는 기분에, 그 전화번호가 아니라고 전화를 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또 무어라 말을 해야 할 것인가.
3주기 때 그분의 아내를 여러 사람의 틈 속에서 다시 만났다. 그때 나는 안심을 했다. 강선생님의 일을 혼자 남아 계속하는구나. 그 일을 하기 위해 열심히 사는구나. 그녀는 아직 그 전화번호를 갖고 있었다. 그림도, 옷도, 모자도, 담배 파이프도, 강아지들도, 골프채도. 아직도 그녀는 남편 강 국진과 살고 있다. 나는 그분이 입원해 있던 병실도 못 갔었다. 그분의 장례식도 참여 못 하였다. 그분의 죽음이 아직도 내겐 실감되지 않는다. 그냥 그분을 어느 날부터 보지 못한 것이다.
요즘처럼 바쁜 생활 속에서 살아있어도 서로 자주 만나지 못하는 것처럼. 그분의 집에 가면 언제나 그분은 외출 중이다. 그분의 아내만이 나하고 이야기한다. 나는 그녀에게 전화를 했다. 밥을 사주고 싶다고. 그녀와 나는 "강 국진을 기리는 사람들의 전시회" 가 끝나는 날 그녀와 함께 밥을 먹었다. 나는 그녀에게 그 동안 밥을 사주고 싶어 했다고 말했고, 그녀 또한 나를 만나고 싶어했는데 그 이유는 내가 자신의 남편에 대한 추억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라 했다. 우리는 아주 친해져 있다.

"언니. 강 선생님이 철부지인 나를 염려해서 보호하라고 언니를 보낸거야. 그치?" 그래애. 나보고 네게 혼자 사는 법을 가르치라고….." 살피듬 두둑한 얼굴, 말은 없지만 열심히 듣는 표정, 활짝 웃지만 참지 못해 터져 나오는 "쿡쿡" 거리는 웃음. 짜임새가 성긴 모자, 중국에서 사 오셨다는 모택동 모자. 그리고 홀과 멀지만 않다며 퍼터로 쳐 버리는 퍼팅. 그래서 얻은 '강 퍼터' 라는 별명. 나는 그 분의 기억을 갖고 있다. 마치 깨진 조선백자의 파편처럼.

- 이인하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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