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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진 ! 그의 부음을 듣고 난 순간 무엇엔가 호되게 얻어맞은 것처럼 멍청히 서 있었다.
'내가 잘 못 들었겠지… 그처럼 건강하던 사람이…'
그러나 현실은 현실이었다. 나는 운전을 할 수가 없어 택시를 잡아타고 메디컬 센터 영안실로 달려갔다. 하얗게 상복을 입고 눈이 퉁퉁 부어있는 부인 황 양자는 나를 보더니 쓰러질 듯 나에게 안겨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한참 만에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떠듬떠듬 울먹이며 이야기를 해 주었다. '건강 체크하기 위해 이 병원에 입원하여 일주일 되던 날, 한 밤에 방문 온 최태신 선생(대학 동기동창생) 부부와 웃으면서 농담까지 했었는데… 그들이 막 병실을 떠나고, 깍은 사과 한 조각을 입에 넣어 주었는데, 씹어 넘기는 순간 숨이 막혀 손을쓸 사이도 없이 그만 · .·' 하고 또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병명은 '심근경색증'.
작가 강국진
작가와 강아지 보리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한동안 어떤 위로의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병고로 3년간을 시달리다가 우리 곁을 떠난 남편 빈소에서 나는 생각도 멎고 감정도 메말라 버렸는지, 내내 울음이 나오질 않아 민망스럽기까지 했었다. 보다 못한 내 언니는 '이 바보야! 넌 울지도 못하느냐? 이 언니가 속 시원히 울어 줄께' 하고는 내 대신 대성통곡을 했었다.
세월은 참 빠르다. 강국진 선생이 우리 곁을 떠난 지 어느새 3년이 지나고, 그를 못 내 그리워하고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모여 그의 추모전을 열게 되었고, 그와의 친분이 있었던 분들 중에서 글을 모아 화집에 싣겠다고 벌써부터 글 청탁을 받았으나 원래 글 재주가 없는지라 무척이나 망설이다가 겨우 이제 펜을 들게 되었다.
강국진. 그는 나와 대학 동기동창생이다. 나는 동양화과, 그는 서양화과다. 그의 실기실을 지나야 우리 실기실로 갈 수가 있어 자주 마주칠 수가 있었고, 강의실에서도 자주 만나곤 했었다. 우리 동양화 실기실은 서양화, 조소 실기실 뒤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뒷산과 실기실 주변은 사계절 모두 특유의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었다. 봄이면 개나리 , 진달래, 철쭉꽃으로, 여름이면 무성한 낙엽송과 이름 모를 들꽃들이, 가을이면 들국화가, 특히 제각기 영롱하고 다채로운 빛깔들을 하늘거리는 몸짓으로 무리져 너울거리는 코스모스꽃과 한없이 넓게 펼쳐져 출렁이는 갈대밭의 어울림은 참으로 아름다웠었다.
그래서 삼삼오오 짝을 지어 각과 학생들이 이 곳을 찾는 발 길은 끊이지 않았고, 덕분에 우리 실기실 주변은 조용한 날이 없었는데,강국진 그도 그곳에 자주 나타나곤 했었다. 그런데 그 때도 그는 무표정으로 혼자있거나 친구들과 어울릴때도 무덤덤하니 남의 이야기만 듣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이쪽에서 먼저 아는 체를 해야만 겨우 입 가에 엷은 웃음이 잠시 스칠 뿐 무뚝뚝했던 그와는 별로 가깝게 지내지 못하였고, 졸업 후에도 한 참을 그와 만날 기회가 없었다.
어느 날, 남편(하인두)은 주례를 서야 한다면서 무척 쑥스러워 하며 집을 나갔다. 처음으로 하는 주례이니 그럴 법도 하였다. 내가 있으면 더 못 할 것 같으니 오지 말라 당부하는 것을 굳이 따라갔다. 결혼식장은 신촌에 있는 로터리예식장. 뒷자리에 자리를 잡고 마음 조이며 앉아 있었다. "신랑 입장" 하는 데 난 내 눈을 의심했다 검붉고 깡마른 강 국진이 아닌 말쑥하고 멋있는 모습의 신랑 강국진이 아닌가! 주례사는 처음 몇 번 더듬거려 내 마음을 조이게 하면서 하객들의 웃음을 자아내게 하였지만, 그런데로 첫 주례사 치곤 재미가 있고 여유가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졸업 후 다시 그를 보게 되었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우린 자주 만나게 되었다.
대학입시를 앞 둔 학생으로 흑석동에 있었던 작고하신 남관 선생님 화실에서 하인두 선생에게 뎃생 지도를 받은 사제지간이기도 한 그는 한성대학에서는 같은 길을 걷는 선후배로서, 또는 동료로서 생활을 하다가 87년 봄부터 하인두 선생이 불치의 병으로 병석에 눕게 되자 그는 정말로 헌신적으로 학교 일과 밖의 모든 일들을 말없이 도맡아 처리하곤 했었다. 눈이 적은 편이고, 울퉁불퉁한 검붉은 얼굴에 회색 바바리코트(허리밸트가 있는)에 베레모를 잘 쓰고 다녔던 것 같다. 그는 베레모만 잘 쓴 것이 아니고 계절과 장소에 따라 여러가지 모자가 등장하는데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었다. 조끼며 가죽구두 흰색 옷, 빨간 머플러 등이 잘 어울리는 한마디로 말해서 그는 멋스러운 남자였다고 할 수 있겠다.
졸업생들 간에 별명은 국진 오빠, 편안한 남자, 곰, 미깡 껍질, 가슴이 따뜻한 남자, 자상하고 인자한 남자 등으로 이름 지어 있었던 것처럼 그는 겉보기엔 말이 어눌하고 발음이 정확하지 않고, 뚱하니 앉아있는 무뚝뚝하고 황소 고집처럼 보이지만, 그가 학생들과 여행 할 때는 자상하고 짐도 챙겨 줄 정도로 격의 없이 편안하게 대할 수 있었다고 한다. 가끔 어쩌다가 그의 교수 연구실에 들릴 것 같으면 정리정돈이 깔끔히 잘 되어 있고 클래식음악을 조용히 틀어놓고 분위기 있는 차를 대접할 줄 아는 그는 매사가 분명하고 섬세한 편이었다.
술집으로는 인사동 사천집, 이모집, 돈암동에 석굴암 등이 있고 다방 하면 안국동에 도라지 다방, 사루비아 다방이 주 무대였던 그 시절 나도 가끔 남편과 함께 술좌석에 참여할 수가 있었는데, 술이 거나하게 취하면 돌아가며 노래들이 나온다. 그 때 부르는 노래들의 십팔번은 김재규 선생의 '돌담길' , 장 상섭 선생은 '검은장갑' , 하인두 선생은 '연분홍 치마', 그리고 어김없이 강국진 선생은 음이 고르지 못한(음치)대로 열심히 "동그라미 그리려다…"하는 "얼굴"을 부르고, 차례가 갈 것 같으면 쑥스러워 하면서도 열심히 부르는 것이었다. 옆에 있던 부인 황양자는 그 슬프디 슬픈 "들국화"를 불러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였던 기억들이 난다.
또 그들은 동물 특히 개를 좋아하는데 85년도인가 우리 집에서 가져 간 강아지는 지금도 자식처럼 키우고 있다. 잠도 함께 자고 일거일동을 거의 함께 하다시피 한단다. 강국진 선생이 세상을 떠났을 때 '보리'(강아지 이름)는 며칠을 음식도 먹지 않고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눈물을 흘리더란다.
하인두 선생이 세상을 떠났을 때는 물론 그 뒤에도 여러 행사를 치렀는데, 특히 삼 년이 되는 해엔 '하인두 그림비'를 세우기 위해 추진위원으로서 그 모임의 번거롭고 궂은 일을 혼자 도맡아 꾸려 나가고 있으면서도 그의 입에서 불평 비슷한 군말 한마디도 들어 본 적이 없어 많은 일을 하였던 그에게 빛을 많이 졌었는데 난 지금껏 그를 위해 아무 일도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미안하기 짝이 없다. 자식 하나 없이 그 넓은 집을 부인 혼자 '보리'를 의지하며 사는 것을 생각하면 난 그런데로 행복하게 살고 있구나 싶다.
남편 없는 그 빈 공간이 얼마나 크고 소중하였던가를, 살면서 뼛속 깊이 스며오는 아픔을 누가 알겠는가!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일들‥‥ 막막하기만 한 앞날들이 잠시도 마음을 편하게 하지를 못한다. 그 때마다 두 부부는 내 아픔을 달래 주었고 용기도 주었다. 아마 그의 부음을 듣고 앞이 캄캄해 졌던 것도 그를 크게 의지하였던 탓이었던 것 같았다.
누구보다도 인간에의 애정과 신뢰도가 깊었던 강국진 ! 나이 50을 훨씬 넘었어도 늘 소년처럼 수줍고 순박하던 그가 친구로서 내 주변에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이제 10월 24일에서 11월 6일까지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그의 추모전을 열게 되었다. 부인 황양자는 초산부의 해산 만큼이나 망설임과 설렘과 불안을 안고, 남다른 진통을 견디며 오늘에 이르렀다. 나는 남다른 감회로서 이 추모전을 지켜보며, 그 부인의 애틋한 그리움은 갈수록 짙고 한으로 맺혀 온갖 상념들이 승화되어 남편 강 국진이 못다한 삶과 예술을 부인 황양자가 자신의 그림 속에 쏟아 넣어 그 동안 침묵을 지켜왔던 그의 그림 세계가 날개를 펴고 신명나게 펼쳐지기를 바라는 바이다.

- 류민자(화가), 19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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