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회고록 > 회고록6   
 
국진을 처음 만난 것은 1980년 5월쯤이었다. 나는 그 때 조선일보의 편집부에 근무하다 『월간조선』 창간 임무를 맡고, 급조된 출판국에서 『월간조선』 편집부장 대우로 일하고 있었다. 우리 창간 멤버들은 유달리 중견화가들과 교분이 두터웠는데, 창간호 표지와 컷 그림을 맡기로 한 김구림화백을 중심으로 거의 매일 저녁 술자리를 벌리곤 했다.
강국진을 만난 것은 김구림 화백과 월간조선 편집동료인 백순기 형을 통해서였다. 이 둘이 어느 날 술자리에선가 "당신하고 비슷하게 생긴 화가 한 사람이 있는데, 사람이 이만저만 진국이 아니란 말야. 사귀어 보면 금방 친해 질 거야" 했다. 며칠 후인가 술자리에서 나는 강국진과 맞닥뜨리게 되었고 우리는 수 인사를 나누고 이내 가까이 앉아 권커니 자커니 했다. 아닌게 아니라 무뚝뚝하고 술이 고래인 그와 나는 별로 말을 하지 않고도 친하게 어울리는 사이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런 우리 사이를 볼 때마다 김화백과 백형은 역시! 하며 웃어댔다.
판화 작업실에서
80년대 초의 그는 약간 비만이었다. 조기 축구를 하며 살 빼기 노력을 하긴 하지만, 워낙 술을 많이 해 살 빠질 겨를이 없다는 말을 가끔씩 하면서도 그는 술을 거절하지 못하거나 앞장 서 마시는 것 같았다. 그러다 프랑스에 가서 얼마를 있으면서, 그리고 귀국해서 1년 후인가 다시 만났을 때 그는 살이 많이 빠져 있었다. 다이어트를 좀 했다는 말이었는데, 그 다이어트란 술을 좀 삼갔다는, 나로선 이해가 잘 안가는 주장이었다. 그의 술실력은 하나 줄지 않고 있었으니까.
술이 들어가 불쾌해진 강국진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언제나 어린애같은 순진함이, 잔잔한 웃음속에 감춰져 있어 즐겁다.
그는 술이 아무리 취해도 그의 눌변처럼 말이 없고, 또 그만큼 쓸데없는 말을 해 실수하는 일이 없었다. "헤헤이! 뭐라카노. 딱 한잔만 더 합시다." 내가 헤어지자면, 그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이 말이었다. 그러나 이 이상은 없었다. 쉽게 단념하고 상대를 용납하는 그의 태도는 잘 배운 술버릇 때문이리라.
나의 고등학교 때부터의 친구인 숨결 새벌과 오랜 그림 친구라는 사실을 알게되고 새벌의 과천집에서 우리는 밤을 세워 막걸리를 마신 적이 있었다. 밤 새도록 한 이야기 가운데 강국진은 몇 번에 걸친 너털웃음과 간단한 의견 피력이 고작이었다. 그러면서도 그가 우리들의 대화에 빠지지 않고 계속 어울렸다고 생각한 것은 그가 남의 이야기를 귀 기울이고 듣는다는 것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만큼 진지한 때문도 있다.

그는 자신에 대해 잘 말하지 않았다. 그의 고향이 진주라는 것을 안 것도 한참 후였고 묻지 않으면 설명해 줄줄 모르는 그 때문에, 나는 그가 새벌하고 친하니까 서울미대를 나온 줄 착각하고 실수한 적도 있었다. 모처럼만의 개인전을 열면서도 "이 형, 한번 놀러와" 정도로, 개인적으로 큰 행사이면서도 대수롭지 않은 행사처럼 말하는 것이 강국진의 성격이었다. 뭐 길게 설명하기 싫으니까 그러는 거라고, 강국진은 짧게 변명하고 말지만 길게 말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데서 그러는 것이리라. 강국진의 말 없음은 새벌의 '한자말 한글로 바꾸기' 논쟁에서 잘 드러나곤 했다. 새벌은 누구든 만나면 언제나 우리 말로만 쓰고 그것을 고집하기 때문에 일쑤, 그럴 필요가 있겠느냐는 반박과, 새벌 말에 대한 감탄과 공감 표시등으로 웃고 떠들어도, 강국진의 입은 꾹 다물어져 섬처럼 남아있는 것이다.

마치 자기 의견이나 대안이 하나도 없다는 얼굴로 말이다. 과묵하기보다 무덤덤이다. 그러나 나중에 의견을 물으면 간단히 "그럴 수도 있겠네 뭐" 한다. 그는 가급적 새벌을 옹호하고 싶은 것이다.
한성대 교수였던 강국진, 외대의 이종진 부총장, 이란어과 김정위 교수, 국악평론가인 시립대의 한명희 교수, 화가 숨결 새벌, 불문학자인 숭실대 이준오 교수, 문예진흥원의 임동지 국장, 부산 국제신문 이숙희 논설위원, 스포츠 조선 서병욱 문화부장, 그리고 필자 등이 회원인 (무르와 모람)은 초창기 강국진이 주동이 되어 이끌던 모임이다. 그는 이 모임의 나들이를 위해서라면 늘 앞장 섰었다. 장소 물색에서 운전기사, 주방장 노릇까지, 즐거워서 어쩔 줄 모른다는 듯 일을 했다. 우리가 무주 리조트에 함께 갔을 때 그는 혼자서 밥하고 국 끓이고 했으며, 나중에 밥이 좀 남자 반찬과 섞어 김밥을 말아 귀로에 막걸리 파티 안주로 긴히 쓸 수 있게 해주었던 것이다.
생전의 강국진
우리들 가운데 그가 빠진다면 우리는 오도 가도 못할 정도였고, 실상 그가 가 버리고 난 다음 우리 모임은 한번도 밖으로, 우리 남자들끼리만 나들이 한 적도 없다.
강국진은 굉장한 멋쟁이였지만 어떤 때 보면 시골서 방금 올라온 촌뜨기 같은 차림을 해 웃기기도 했다. 모자를 써 봤자 웃음거리가 되던 시절에 모자를 즐겨 쓰고 다닌다든가, 당시만 하더라도 젊은이들만 입는 개량한복 비슷한 옷을 입고 맨 발에 샌달 비슷한 여름구두를 신고 활보하던 그였다. 그것은 시대를 앞서가는 안목과 실천의 용기였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의 그림에 대해 좀체 말하려 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우리가 친했으면서도 그의 대표작이 뭐며 화가로서의 강국진의 위치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그러면서도 그런 우리의 무관심에 대해 탓하거나 자신의 미학을 강변해 알리려 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화가들이 그렇듯이. 그는 우리 (무르와 모람) 사람들에게 모처럼 그림 하나씩을 나눠줬는데, 소품의 판화였다. 가기 6개월 전인 가, 부부모임으로 양평의 콘도에 갔을 때였다 그로선 모처럼의 일생일대의 마음 다짐으로 준비했던 거 였으므로 우리들은 모두 감격해 있었다.
나에게 온 것은 2호 정도의 평소 그의 그림과는 색다른 동화적인 냄새가 짙은 거여서 아주 기분이 좋았다. 나는 그 그림을 내 서재에 걸어놓고 늘 지켜본다.
하남시에 있는 강국진의 집을 가본 사람은 아마도 깜짝 놀랄 것이다. 강국진의 유품들이 , 그가 마지막에 입던 옷가지 등과 함께 고스란히 놓여져 있기 때문이다. 그의 미망인 황양자씨가 마치 "강국진은 지금 외출 하고 있습니다. " 식으로 하나 손대지 않고 정돈해 둔 것이다. 벽에는 강국진이 생전 가장 최근에 그린 그림과 책상 위의 안경, 메모지 등등.. 게다가 그의 윗도리까지 의자에 걸려 있는 것은 숨을 쉬듯 정결하기까지 해 사람을 당혹하게 만든다. 황양자씨는 아마도 매일 아침 옛날에 하던 대로 그의 아틀리에를 청소하고, 음악을 틀어놓고 이야기하며 하루를 맞을지도 모른다. 이 얼마나 지극한 사랑인가.
우리 모임은 그림과 별로 관계가 없는 사이들로 어울려 있어 사실 강국진의 그림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 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은연중 나름대로 각자의 안목은 있어, 강국진의 그림에 대해선 자주 언급을 않고 있었다. 비상업주의적 그림이라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었지만 좋다고까지는 하지 않았다. 한데 아주 최근 전혀 우리는 강국진의 그림세계가 아닌 그림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어 깜짝 놀라버렸다. 이 그림은 해남 동서 댁에 걸려 있던 것으로, 우리 (무루와 모람)이 거기 강국진의 동서 김 귀선씨의 초대로 가서 보았던 것이다. 그 그림은 새벌까지도 낯 설은 것이라고 조심 조심 논평 할 정도로 신선한 느낌을 주던 거였다. 세로로 죽죽 긋던 선의 세계가 아니라 가로선이 끼어들고 무수한 사각들 안에 모양들이 꼼꼼하게 그려져 있었다. 이것을 보고 우리들 중 누군가가 강국진의 그림 중 가장 잘 팔리는 그림이 될 것 같다고 해 모두 웃었다.
강국진과 그의 부인 황양자씨의 애정을 가끔 봐 온 나는, 강국진이 가고 나서 그 깊이를 새삼스럽게 알 수 있었다. 강국진은 사랑하는 철부지 아내를 위해 시장도 보고 밥도 하고, 심지어 동사무소에 가서 주민등록증까지 늘 자신이 떼 왔다고 했다. 그런 그가 없어졌으니 아이도 없는 그의 아내는 어떻게 살 것 인가고, 특히 황양자씨의 언니 오빠들의 걱정이 태산이었으나 역시 사람은 부딪치면 다 해결 해 나가기 마련이어서 그다지 큰문제가 없는 모양이다. 우리 (무르와 모람)의 멤버로 빠지지 않고 참석하면서 작품활동도 하고, 강국진의 유작전 준비하고 바쁘게 지내고 있으니 말이다.
내가 아는 강국진은 절대로 약속시간을 어기지 않는 사람이었다. 항상 먼저 와 우두커니 서있거나 혼자서 신문을 뒤적이던 그였다. 그런데 그가 딱 한번 우리 모임에, 아무 연락도 없이, "강선생님 오늘 못 가요!" 하는 부인 황양자씨의 실의에 찬 목소리와 함께 빠졌던 것이었다 그는 그 때 저 세상으로 가기 바로 전 날 침대 위에 있었다.

이튿날 멀쩡하던 그는 정말 덧없이 54의 화려한 나이로 인생을 마감한 것이다.

- 이유경 (화가)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