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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1978, 31.8x40.9cm, 캔버스에 오일
제는 부르지도 못할 나의 형님, 국진 형!
무엇이 그리 급해 황급히 떠나셨습니까?
남겨진 우리들에게 작별 인사 한 마디 없이 그렇게 훌훌이 떠나셔야만 했습니까.
형님은 본시 말이 없으셨기에 짐작은 합니다만 심중에 남아있는 말 한마디를 끝내 하시지 못하고 가셔야만 했습니다.
이제 허공을 불러 볼 형님의 이름이여!
기억하기도 싫은 92년 3월 1 일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상경하는 마음은 왜 그리 불안한지…
메디컬 센터 입원실로 들어섰을 때 이게 웬 일입니까?
계셔야 할 형님은 간 곳 없고 차갑게 정리된 병실은 무엇을 뜻합니까. 바로 영안실로 찾아 간 우리들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는 비탄과 설움에 몸둘 바를 몰라 했습니다. 이제는 하나의 과거사로 어두운 가족사의 한 페이지일 뿐입니다.
사실 피를 나눈 형제로서가 아니라 형님은 그림 아니면 못살것 같았던 분으로 기억 됩니다. 노래를 잘 하시나, 말을 잘 하시나, 사교성이 좋으시나, 착하디 착한 형님은 참으로 하느님이 그림으로 잘 선택해 주셨다고 믿어 왔습니다.
형님은 4살까지 말이 없어 벙어리인 줄 알고 때려 울려 보았다는 어머님의 말씀처럼 입이 무거우셨습니다. 처음 사귀기가 무척 힘이 드나 친해지고서는 깊은 정이 많으셨고 경상도 사나이 특유의 끈기와 의리도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국민학교 때 학교 대표로 사생대회에 나간 적은 있었지만 본격적인 그림수업 시작은 중학교 미술반에 들어가고 부터라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 목수에게 부탁해서 이젤을 찾았을 때 어떻게나 대견해 하시는지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중학교 때 어느 날 학교 갔다오니 저희들 방 책상 위 벽에 수채화로 어느 절풍경을 그려 놓은 것을 보고 참으로 좋은 그림이다 하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솔직한 이야기로 60년대 말 행위예술을 하시던 어려운 시절 예술가의 삶이 너무 춥고 배고파 보였기에 형님이 참으로 어려운 선택을 하시지 않았나 안스러워 한적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밤 새도록 소주를 기울이며 인생을 논하고 예술을 논할 수 있었던 훌륭한 화우가 있었던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가고 없는 분도 계시고 형님 또한 홀연히 사라지시어 불러도 불러도 대답없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한창인 오십 넷, 옛날 그 설움 어떻게 덮으시고, 남은 세월 빛나는 삶 한자락 바람되어 이렇게도 할퀴고 떠나셨습니까.

가는 님이야 서(西)녘으로 서(西)녘으로 가면 되지만 남은 중생 몰래 홀로 앓다가 가을 낙엽이되어 흩어지면 언제 어느 강산에서 또 만날 수 있으리오.
먼저 가신 형님 자죽 눈물 자락으로 훔치어 인생 무상함을 화폭에나 담아 볼꺼나.

- 강국안(동생), 부산에서 형님을 그리며, 19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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