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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동 (전시기획자. 계간『미술과 담론』편집인)
제1회 논꼴 동인전 출품작 1965년작
25.0*29.0(변형10호) 종이에 오일
제1회 논꼴 동인전 출품작 1965년작
25.0*29.0(변형10호) 종이에 오일

1.
강국진은 1960년대 중반, 실험미술을 추구하는 청년작가 그룹
<논꼴>동인의 일원으로 우리미술계에 등장하였다. 그는 기성화단 풍토에 안주하기 보다는 끊임없는 실험과 모색을 통해 늘 자기비판적 작가로 남길 원했다. 그는 나름의 비중을 가지면서도 주류적 흐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보다는 다소간 주류와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자신의 세계를 모색해간 작가였다. 주류미술이 제도화 해가는 영역 외각의 주변부 영토에 관심을 가진 경계인 으로서 이질적인 것들에 대한 정당한 가치를 추구했던 작가였다.

강국진의 작품의 흐름은 일반적으로 네 개의 시기로 구분된다. 60년대 중반 <논꼴>과 <신전>,<청년작가연립전>의 활동으로 대표되는 초기의 행위예술과 매체실험적 작업, 그리고 70년대의 다양한 오브제 작업, 80년대 전반의 선조(線造)작업, 그리고 운명을 달리하기 직전의 선조와 전통 소재의 형상화를 병치한 새로운 내러티브 작업의 시기가 그것이다. 다양해 보이는 그의 작업을 일관되게 가로지르는 공통점이 있다면, 자신만의 어법으로 이루고자 한 현대미술의 한국적 수용방식의 실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성 화단은 습성상 새로운 운동을 양식화하고 이를 제도로 고착화하기 때문에 지속적인 실험을 추구하는 그는 늘 주류적인 기성 화단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가장 활발한 활동을 보이던 6.70년대 한국화단은 서구미술에 대한 불완전한 이해를 바탕으로 서구양식의 모방적 수용을 주류적 가치로 삼는 주도세력들에 의한 패권적으로 미술문화가 형성되던 시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주류적 흐름에 부분적으로 동승하기도 하였지만, 늘 우리의 풍토를 기반으로 자신의 어법에 충실한 작업을 모색하고자 하였다. 그는 한국현대미술 최초의 행위예술가의 한 사람으로, 최초의 테크놀로지 아티스트로, 최초의 판화공방 운영자로, 그리고 최초의 집단창작스튜디오 개념을 구현하였던 작가로, 지역과 주변부 아티스트들을 위한 관심을 가졌던 예술가로, 그리고 다양한 분야의 인사들과 함께 한국의 문화와 사상에 대한 탐구에 관심을 가졌던 예술가로 기억되고 있다.

이처럼 그는 늘 다양한 영역에 관심을 가지면서 새로운 노정을 탐색하는 시각예술의 방랑인 이자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에서 주류의 한계를 해체코자 하였다. 우리의 현대미술사는 화단의 주류들에 의해 자신들의 운동사를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기술되어있다. 이로 인해 숱한 잠재적 요소들을 획일화된 틀로 단순화 시켜버린 감이 없지 않다. 이렇게 매몰되어 버린 한국현대미술의 다양한 잠재태를 발굴하는 일은 우리시대의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일 것이다. 강국진의 의미는 이러한 잠재태 중 매우 중요한 위상을 점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꾸밈 1976년작 165*155*96 유리병.색종이.색물감.거울
한강변의 타살 1968년작 작가 강국진의 `문화 고발문 낭독'

2.
강국진의 노정: ‘추상 이후’의 다양한 실험

가. 문명비판적 행위예술과 다양한 매체실험 그가 1965년 <논꼴>의 동인으로 활동할 당시, 화단은 이미 양식화 되어버린 앙포르멜과 추상표현주의적 경향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양식은 젊은 그에게는 무조건적으로 수용할 수 없는 하나의 장애였다. <논꼴>이란 당시 강국진을 중심으로 한 젊은 동인들의 집단창작 스튜디오가 있던 홍제동 화장터(현재는 고은초등학교) 인근의 지명으로, 이는 당시 20대 후반의 청년작가들의 집단적 실험정신의 상징이었다.

그들은 당시 화단을 지배하던 앙포르멜과 추상표현주의 양식의 언저리로부터 탈피하여 그들만의 새로운 언어를 찾아 다양한 조형적 실험을 추구하였다. 물론, 제도화된 기성화단의 큰 틀을 벗어 던지고 새로운 어법을 찾는 일이 그리 쉬운 작업은 아니었지만, 이러한 젊은 작가들의 의지는 1967년 결성된 <청년작가연립전>을 통해 구체화되었다. <청년작가연립전>은 <무>동인 <신전>동인 그리고 <오리진>등 3개 청년작가 동인들로 구성되었는데, 강국진은 <신전>동인의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주로 행위미술을 주로 하였다. 입체나 설치작업 성향의 <무>동인과 기하학적 추상에 경도되어있던 <오리진> 동인들에 비해 <신전>동인들은 가장 아방가르드적이었다.

물론 <무>동인들의 경우 역시, 그들의 작품 형식이나 사회적 메시지가 실험성을 가지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논꼴>동인들이 주축이 된 <신전

>동인들의 경우 그들은 행위예술을 통해 기성사회와 문화예술계의 모순을 폭로하며, 비판하는 작업을 추구하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종래의 추상표현주의 일변도에서 벗어나 행위예술과 오브제 등 새로운 경향의 작업들을 통해 자신들의 독자적 언어를 개척하였다.

강국진은 청년작가 연립전의 중심리더로서 활동하면서 수 차례에 걸친 해프닝을 직접 구성하고 실연하였다. 이 무렵 해프닝이란 단순한 행위로서의 의미만이 아니라 사회비판적, 문명비판적 색채를 강하게 띰으로써 한국적 상황의 독특한 산물로 간주되었다. 특히 <논꼴>의 동인들인 강국진, 정찬승, 정강자는 새로운 시대를 여는 작품에 열광했다.

그들은 1967년 <청년작가연립전>에서 보인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1968년 <투명풍선과 누드>,<한강변의 타살>, 1969년 <문화인 장례>등을 연달아 발표했다. 이러한 해프닝은 당시의 사회문화적 풍토에서는 받아들여 지기에 매우 힘든 양식이었다. 특히 정치, 사회문제에 대한 비판의 메시지들은 이들을 불온분자로 인식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문화예술계로부터도 그들은 '문화깡패', '미친 짓이나 하는 타락한 예술가'들로 취급되었다. 그들은 ‘추상 이후’ 의 작품을 통해 대중과 친숙한 환경미술을 추구하였지만, 역설적이게도 당시의 억압적 사회풍토 내에서 이들의 작업이 받아들여 질리 만무했다.

그들이 인식한 50년대 말의 추상표현주의는 이식된 해적판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필연성에 의해 받아들여진 것이 아닐뿐더러 외국 작품의 모방내지 흉내를 내는 정도이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작품을 ‘추상 이후’ 의 작품이라고 스스로 규정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의 실험적 작업은 사회비판적 메시지를 담은 행위예술 이외에도 1967년 네온과 스텐레스 스틸을 결합한 <시각적 즐거움>과 같은 테크노아트적 경향을 선보이기도 한다.

시각의 즐거움 1967년작
280*46*46 네온.스테인레스.스틸

이는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구현된 최초의 테크노 아트로서 한국현대미술의 새로운 장을 열기도 하였다. 1970년대 이전까지 강국진은 지속적으로 추상표현주의 일변도의 관습적 미술을 탈피하여 행위와 매체를 통해 매우 다양한 실험적 작업을 펼친다.

상관 1972년작 242*148*31
앙데팡당전.시립미술관 초대전 .환원 미술관 초대전
나. 오브제와 일상, 그 상관성의 탐구

70년대에 들어서면 그의 작품은 오브제가 주종을 이룬다. 이는 당시 한국화단에 불었던 젊은 작가들의 주된 경향으로서 서구의 팝아트와 네오아방가르드적 성향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한편으론 미니멀아트와 개념미술, 그리고 여기에 일본의 모노하(物派)의 영향이 유입되면서 다양한 입체와 오브제 작업들이 제작되었다. 그의 작품은 일상적 사물들과 폐품들을 사용한 것들로 일상적 오브제와 환경예술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였다.

강국진의 오브제는 1973년 명동화랑 개인전에서 핵심적 의미를 가지고 등장한다. <형의 상관>이란 부제의 그 첫 개인전은, <청년작가연립전>에

서 보여준 실험적 의도를 발전시켜 더욱 자신의 언어로 다져진 것이었다. 그의 작품들은 물질의 다양한 표정과 상황의 가변성을 내세운 개념적 작품들로 채워져 있었다. 광목천, 로프, 새끼줄, 골판지. 한지 등 다소 거친 재료를 사용한 평면과 오브제들로, 물질이 갖는 고유한 질료와 그것들의 대비적인 관계항을 통한 여러 물리적 현상을 두드러지게 부각시켰던 작품들이었다. 그의 개념적인 작업은 1973년 개인전을 전후로 한, 1973.4년 <앙데팡당>전에서도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다.

당시 강국진의 작품으로는 일정 크기의 침목을 바닥에 세우고 그 위를 천으로 싼 다음 끈으로 다시 묶는 입체물 이었는데,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물질과 상황의 독특한 관계항에 대한 그의 꾸준한 관심이 개인전과 <앙데팡당>전을 통해 지속 되어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70년대 중반 일본 모노하의 영향 하에 한국화단은 다양한 오브제와 입체작업들이 주종을 이루면서 한편으로 단색조의 평면회화로 경도되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강국진은 이러한 획일화된 미학에 동의하지 않고 좀더 다양한 어법의 미술언어들을 위한 장을 만들기를 원했다.

1977년 작가 김한과 함께 결성한 <서울방법전>은 그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이 기획전은 주류화단의 편향된 단색조 경향에 대해 지역과 주변부의 다양한 작품들을 실험하고 발표하는 장이었다. <서울방법전>을 통해 입체작업과 오브제, 개념미술, 드로잉, 메일 아트 등 다양한 표현방식과 미술언어들이 선보였고 이를 통해 후일 획일화된 단색조회화로부터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 맹아를 형성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그의 새로운 매체에 대한 또 다른 실험은 1975년 판화 개인전을 통해 드러나듯 다양한 판화작업을 시도하였다는 것이며, 한국최초의 판화공방을 조성하여 후학들을 교육시키기도 하였다. 그는 판화라는 주변부 영역의 중요성을 한국화단에 새롭게 인식시킴으로 우리 미술문화의 다채로움을 제공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형의 상관 1973년작
65*35*35 침목.한지 명동 화랑 개인전
가락85 초록 빛 속에서 1985년작
90*117(50호) 오일에 캔버스

다. 선묘와 회화의 본질

80년대의 한국화단은 단색조회화의 획일성과 형식주의 미학이 다양한 사회문화적 욕구에 의해 강한 도전을 받은 시기이기도 하였다. 한편으론 예술의 정치사회적 기능이 강조된 현실비판적 리얼리즘 경향이 강세를 보이기도 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론 획일주의적 미학과 이분법적 미학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둔 작은 담론들이 다양하게 등장한 시기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작은 담론들의 출현은 70년대 다양한 주변부의 실험적 활동들이 바탕이 되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실제로 ‘70년대 중 후반에 들면 한국화단은 거대한 ‘단색조 회화’ 와 ‘백색주의’라는 블랙홀이 존재하였지만 그 주변에는 다양한 조형적 실험들이 지속되고 있었다.

이 작은 담론들이 가지는 의미는 종래 서구미술의 양식적 차용과 무조건적 추종, 그리고 이를 획일적 미학으로 제도화 해가는 양태로부터 벗어나 우리의 현실과 문화적 전통을 기반으로 한 서구미술의 변용에 대한 관심이 구체화된 실천의 형태로 나타났다는 점일 것이다. 이러한 다양한 작은 담론의 형식실험들은 소위 ‘민중미술’로 지칭되는 현실참여적 경향과 그런 점에서 큰 틀에서의 공유점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한국적 정서와 문화적 전통, 그리고 현실에 대한 자각 등이 그것이다.

외형적으로 이러한 화단의 역학은 사회적 리얼리즘과 형식주의로 이분화될 수밖에 없었지만, 그 내면에는 70년대 획일주의를 탈피 하고자 하는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하는 것 이었다. 상대적으로 형식주의적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미술영역에서는 전통미학에 대한 탐구와 다양한 매체의 실험들, 그리고 다시 그리는 행위성에 대한 각성 등이 일기 시작하였다.

강국진의 80년대는 획일주의적인 단색조회화로부터 벗어나 그리는 행위의 본질적 속성인 선으로 회귀하는 시기이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선묘, 직선의 집적이 그것이다. 그러나 선만으로 화면을 완성하기보다는 내면에 특정한 형상이 배경으로 깔리고 그 위를 지속적인 수직선을 반복적으로 집적시킴으로써 화면 위에 이중적 레이어를 형성하는 구조이다. 이는 회화의 본질에 대한 물음에 있어 ‘단색조의 평면’을 주장하던 주류적 흐름과는 달리, 그리는 행위의 집적으로 이를 규명 하고자 한 것이다.

가락81-11 1981년작
145.0*112.0(80호) 캔버스에 오일
가락81-10 1981년작
90*116.9(50호) 캔버스에 오일

또한 그리는 행위 그 자체 만으로가 아니라 그려진 이미지를 그리는 행위를 통해 무화 시키며 그것들의 상관성을 구하는 것으로 회화의 본성을 구하고자 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선들의 집적이 담아내는 작가의 호흡과 정신적 흐름의 궤적을 통해 물질적 존재로서 회화의 본질을 규명 하고자 한 주류적 태도와는 달리 정신과 감성적 요소를 통해 회화의 근원적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선이 보여주는 리듬과 운율은 회화가 단순히 그려진 형상만도 아니며, 그려진 결과로서의 물질만도 아닌 그 상관성의 문제라는 것인데, 이러한 그의 태도에는 회화에 대한전통적 사유가 개입되어 있는 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회화에 대한 접근방식은 후일 ‘90년대에 그가 보이고 있는 형상과 선의 이중구조를 통해 구체화되고 있으며, 회화가 본래 가지고 있는 서술성에 대한 회복을 꾀하는 입장의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라. 회화의 이중구조, 새로운 내러티브의 회복

90년대 들어서면 그의 작품은 매우 변화된 국면을 맞게 된다. 추상 이후의 미술을 통해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하였던 그의 작업은 외견상 데이비드 살레나 로버트 롱고, 안젤름 키퍼 등으로 대표되는 서구 뉴페인팅의 양식과 유사점을 보인다. 이러한 경향은 당시 화단 일각에서 젊은 작가들에 의해 폭넓게 수용된 포스트모던적 징후의 하나이기도 하였다. 거칠고 어눌한 어법의 묘사를 기초로 한 형상화, 한 화면에 등장하는 서로 다른 차원의 이미지, 그리고 거친 내면적 표현성이 강조된 회화의 복 권 등. 그러나 강국진의 작업은 서구의 그것들과 맥락을 달리한다.

역사의 빛 1989년작 324*130(300호) 캔버스에 아크릴

서구 뉴페인팅 회화 작업들은 대개 하나의 화면에 서로 이질적인 이미지들이 공존시킴으로써 모던아트에서 금기시했던 새로운 알레고리의 회복을 주된 방법론으로 하고 있다. 그들의 경우, 하나의 획일적 시각을 탈피하며 모던 이후의 다양한 시점과 관점을 혼융 시킨 다원화된 세계관의 표명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강국진의 작품은 이질적 이미지들의 공존을 통해 다원주의적 세계관의 표출로 특성화되는 서구의 작업들과는 달리 강국진의 그것은 상호 보완적 이미지들의 병치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진 그의 화면의 한쪽은 구체적인 형상들이 나타난다. 이 형상들은 석굴암의 본존불, 돌부작, 부적에 등장하는 독수리, 기마인물상, 색동 등과 같이 한국적 소재들이며 다른 한쪽에는 추상적이며 물질과 표현성이 강조된 드로잉이나 선묘가 등장한다. 이 두 개의 요소들은 전통적 소재와 한국적 정서의 표현이라고 하는 두 개의 축을 형성한다. 결국 이질적 화면의 병치는 80년대 형상과 선묘의 만남을 통해 이의 상관성을 질문함으로써 회화의 본질을 질문하던 문맥과 상통하는 상보적 관계항 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의 빛 1989년작 227.3*181.8(200호) 캔버스에 아크릴

그의 말년의 작업들은 그가 유명을 달리하기 불과 2-3년의 과정을 통해 제기된 것으로 후속작업을 통해 완숙한 그의 조형세계에 관심을 가졌던 우리에게 다소간의 아쉬움을 남기게 되었다. 말년의 왕성한 그의 작업이 지향하던 바가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단지 <역사의 빛>이란 명제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 역사 속에 내재한 다양한 소재를 통해 전통적 조형의 어법과 사유를 모색함으로써 새로운 회화적 어법을 제시하며 더 큰 회화적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의지의 단초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마지막 작품들을 보면 화면의 이중구조마저 해체되어 두 개의 요소가 한 화면에 통합되어가는 조짐을 살필 수 있기 때문이다. 회화의 본성과 구조에 대한 탐구를 벗어나 어쩌면 그가 자유롭게 느끼고 표현하고, 말하고자 했던 바 아무런 구애를 받지 않는 삶과 하나된

예술의 세계를 지향한 것으로 보인다. 서구의 신표현주의가 다양성의 사회를 반영하는 것이라면, 강국진의 세계는 다중성의 세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강국진은 ‘그리지 않는 회화’를 지향하여 행위예술을 시도하며 다양한 매체 실험을 꾀하던 그의 초기 전위적 태도로부터 먼 여정을 돌아와 궁극적으로 ‘그림의 자유’를 획득한 것인지도 모른다.

3.

이상에서 간단히 살펴본 바와 같이 강국진의 조형세계는 한국현대미술에 있어 매우 독자적인 횡보를 지닌 하나의 잠재태이다. 초기 극단적인 실험미술인 행위예술과 매체실험적 미술을 통해 서구의 양식을 무비판적으로 차용하며 안주해버린 기성화단의 관습을 해체하고자 하였으며, 기성화단과 일정한 거리를 두며 다양한 어법의 작업을 시도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의 조형세계를 모색해 갔다. 그의 행위예술은 단순히 신체를 사용하는 새로운 매체실험이라기보다는 기성사회와 문화에 대한 비판적 몸짓으로 자신의 행위를 활용하였다는 데 의미가 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70년대 다양한 현실의 오브제들을 미술문맥 속에 끌어 들이는가 하면, 네온을 사용하여 키네틱한 예술작품에까지 이르고 있다. 그의 주된 관심은 주류적 미술이 제도화 되어버린 상황 속에서 지속적인 실험을 통한 자신의 미학 탐구였다. 그의 입장은 단순한 형식실험의 차원보다는 예술을 통한 사회의 변화를 꾀하였던 아방가르드적 속성이 강하다. 끊임없이 제도와 현실과 거리를 두고자 하는 그의 태도에서도 이를 찾을 수 있다. 페터 뷔르거를 비롯한 독일의 비판철학자들의 입장을 빌면 일반적으로 역사적 아방가르드는 자본주의의 제도화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실패하고 말았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주장을 설득력 있게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강국진은 끊임없이 제도와 거리를 두며, 주류보다는 주변부에 대한 관심을 지속하였으나 70년대와 80년대를 거치면서 한국미술의 빠른 상업화와 정치적 성향의 비예술적 에너지들과 이념들이 그를 비롯한 많은 70년대의 실험활동에 대한 비중을 약화시켜 버렸다.

역사의 빛 1991년작 90*116(50호) 캔버스에 아크릴

그러나 그의 작업은 70. 80년대의 양극화 현상을 보인 이면에서 주변부의 다양한 작은 담론생산을 위한 원천 중 하나였다. 그가 초기에 시도하였던 행위와 키네틱아트 등 매체실험, 그리고 최초의 집단작업실, 판화공방 설립과 운영, 그리고 주변부의 미술의 인큐베이터가 되었던 <서울 방법전>등의 실천이 바로 그것이다.

90년대 들어 획일적 사고를 기조로 한 기성화단의 구조가 서서히 다원화되기 시작하면서 서구미술에 대한 대안적 활동들이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물론 오늘과 같은 글로벌 시대에 서구 양식에 대한 차용이란 표현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로 피아간의 구분 없이 혼성모방이 진행되고 있지만, 다른 한편에선 국가들마다 자신들만의 조형언어를 찾기 위한 노력들이 심도있게 진행되고 있음을 본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의 미술의 궤적을 편편히 다시 살피는 것이 중요한 과제이며 이런 연유에서 최근 ‘현대미술 다시 읽기’ 가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한국미술은 외양적으로는 부단한 서구미술의 차용의 연속처럼 보이지만, 그 바탕에는 서구의 미술을 우리의 토양에 부합되도록 창조적으로 수용코자 하는 맥을 가지고 있음이 간과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미술언어의 다원화와 다원성의 뿌리가 우리의 6.70년대 젊은 작가들에 의해 부단히 시도되었던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기존의 미술사가 편향된 시각으로 만들어낸 봉우리들의 이면에 우리미술의 잠재성이라는 깊은 계곡이 있음이 간과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6.70년대의 다양한 전위적 작업과 주변부에 대한 가치 인식을 통해 우리시대 다원화된 조형언어와 대안적 사유의 기초를 다진 인물이었고, 주류적 미술과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서구미술의 한국적 수용방식을 탐구하기 위해 노력한 강국진의 미술사적 의미가 중요성을 가지는 것도 이러한 연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