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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헌영 (금호문화1990.4)
서울로 진입하는 톨게이트 좌측 산언덕배기엔 소담한 교회와 아우러져 하얀 집이 보인다.
밑 터진 바지를 입던 시절, 엄마가 들려주던 동화 속 같은 집이다. 이 동네 아이들은 이 집을 “그림 그리는 아저씨 집”이라 한다. 동네 초입의 잔디순의 앙증맞음과 봄바람의 화창함에 소년처럼 가슴 설레는 방문이다.
이 하얀집에 사는 이가 “가락의 화가” 姜國鎭이다.
강국진의 삶의 자흔을 간략하나마 알고 간 방문이기에 강단 있게 대하려 했으나 그의 투박한 정감과 벽난로의 안온함에 어줍잖은 격식은 봄눈 녹듯 사라진다.
강국진은 작년 5월 전시회를 포함해 총 11회의 입체.평면 전시회를 가졌다.
73년, 첫 개인전을 가진 이래 15년을 한결 같은 집념으로 線條作業에 몰두했다. 그러나 87년 부터 서서히 지난한 몸부림 끝에 88년과 89년의 지속전인 실험을 통해 마침내 새로운 <시도>를 착상한다. 그는 이 시도를 [역사의 빛]이라 명했다.
새로운 착상으로 내놓은 [역사의 빛]은 그가 85년까지 즐겨 다루었던 선조작업의 하나인 <가락>시리즈와 크게 궤를 달리 한다. 곧 이것은 십 수년간 정갈한 정을 쏟던 일단의 작업들에 괄호를 매겨두고 신실한 자신의 지금과 미래를 새로이 구상하기 위한 “역사의 빛”의 장강대하에 들어선 것이다.
빛의 흐름 1986년작 41*45 평판화
우연히도 그가 펼친 새로운 명제인 <역사의 빛>은 그의 선조작업 15년을 가름하면서 깨달은 작가 자신의 역사에 대한 통찰을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통찰의 과정에서 한국미술의 전통내지는 진수라 믿었던 線條性 (linearity) 의 현대적 표현에 관련된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천착하던 끝에 이루어진 것이다.
[제가 추구했던 현대적 표현에 관련된 <가락> 시리즈가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線條’, 우리민족의 고유한 기질에서 발현된 것과 함께 ‘현재’에 살고 있는 특정한 ‘개인’을 통해서 이러한 기질들의 발현 가능성을 작품으로 옮기는 절차에서 선택한 게 칠하는 대신 <긋는 행위>를 반복하는 작업이었습니다. 긋는 행위의 반복을 통해 화면의 상하로 그어지는 다양한 색조의 길쭉한 선들의 이음새가 평면전체의 <구조>를 결정함을 알게 된 것이죠. 즉 선조적 특성에 의한 화면의 <平面的>해결은 작품으로 하여금 선조에 의한 평면의 고유한 <氣質的 發顯>을 성공적으로 표현하려는데 목적이 있겠습니다. 물론 이 같은 발현은 집합적인 것과 작가인 제 자신의 융합이라는 점에서 보편적인 표현입니다. 특히 저의 선조구조와 이 구조를 지지해 주는 캔버스와 색료, 그리고 무엇보다 평면이라는 조건 등 일체의 支持體를 구조적 통일에 의해 해결하려 했습니다]
강국진은 녹색, 연한 갈색, 암바, 퍼플, 코발트, 크림슨레이크, 오커 등 모든 색상들을 즐겨 다루면서 이것들을 붓에 의한 선으로 그어서, 평면을 채울 수 있는 만큼 가득히 채우는 일이 긋는 행위의 반복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화면의 구조를 선조구조로 해결하려는 그의 착상은 세부적으로는 이러한 선조구조의 배면에다 언덕이나 산의 능선, 도식화된 파선, 대칭선, 마름모꼴, 때로는 산과 나무 등 우리 산야와 전승 문화재의 일부를 배열하고 암시함으로써 이것들의 배경으로 그어지는 선조구조가 그것의 ‘線條的 特性’에 있어 보다 더 명료해지는 효과를 얻고 있다.
강국진은 기존에 추구했던 <가락시리즈>에서 그 다음으로 이어질 <역사의 빛>을 준비하기 위해 어떠한 성찰을 자신에서 발견하고 있는 것 인가. 그것은 선조구조와 평면구조의 일원화에 의해 선조성의 정신적 발현이 충만해 있다 하겠다. 곧 민족의 집합적 정신이나 작가의 개성적 기질성은 화면이 가지는 지지체의 특성을 이 선조구조의 특성으로 전환시키려는 부단한 기도이기도 하다.
<역사의 빛>은 이처럼 <가락>시리즈의 갈망 위에서 시작한다. 강국진은 하나의 과도기적 이행과정으로 87년 우정미술관 리도그라피 초대전에서 <빛의 흐름>의 연작들을 발표한다.
[판화의 시도로서 <빛의 흐름>은 <가락> 구조의 해체로 가는 과정의 단면입니다. 따라서 현재 진행중인 <역사의 빛>은 <빛의 흐름>이 보여주고 있는 <가락>의 구조를 해체하는 절차와, 이 절차에서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려는 형태로 바꾸어 놓으려는 노력이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해체과정에서 얻어진 게 바로 <역사의 빛> 입니다.
<역사의 빛>은 화면을 좌우로 이등분해서 예컨대, 왼편에다 기마상이나 옛 한국화에 등장하는 바위, 부적에 나오는 독수리, 불상들을 그리되 오른편에는 나무숲이나 꽃, 무지개, 화려한 숲, 풍경 등을 연상시키는 다소 복잡한 도상들을 삼각형이나 사각형, 원이나 곡선, 대각선들을 도입하여 제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내용을 처리 했습니다.
가락/뫼81-8 1981년작 44*54 에칭
이와 같이 처리하는 화면절차는 종래의 제가 견지해 오던 사색의 선조구조를 실현함과 동시에 과거의 미세구조(선조구조)를 과감히 부수고 있기도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과거에 있었던 것들 (즉 왼편의 주제들)과 현재에 볼 수 있는 것들 (즉 오른편 주제들)을 대조시킴으로써 <形象들의 이야기>를 구성, 시도하고 있습니다.
쉽게 풀자면 가령 왼쪽의 기마상은 기마상을 잘 그려 나타내고자 함이 아니라 단지 과거의 정황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린 것이죠. 마찬가지로 기마상에 대응하는 오른쪽의 풍경 또한 단지 현재의 정황을 나타내도록 하려는 데서 배려된 것입니다.]
미술평론가 김복영씨는 강국진의 <역사의 빛>을 이렇게 말한다.
[이와 같은 형상들의 이야기구조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 작품의 구조는 전적으로 종래의 선조에 의한 <형식구조>로부터 형상에 의한 <이야기 구조>로 전환되었음을 보여 준다.
그의 이야기 구조는 근본적으로 과거 對 현재, 밝음 對 어둠, 복잡 對 단순, 낡은 것 對 새것 등의 대립적 상황들의 <통합>의 모색임을 알 수 있다. 그는 가끔 형상을 빌리지 않고 단순히 색면과 약간의 선조들을 동반한 가장 단순한 색면대조를 보인다. 아마 이 경우는 특히 明과 暗의 대조와 통합을 극명하게 표한함인 듯 하다. 또한 왼편의 녹색바탕에 불상을 그려 명상하는 자태의 단순성을 나타내고 이와 대조되는 복잡한 상황을 오른편에 배열하는 경우와 같이 단순성과 복잡성의 이야기구조를 극히 종합적으로 얻으려는 시도로 보인다.]
가능한 한, 종래와 달리 더 많은 변화를 추구하기 위해 구체적인 것, 형상적인 것을 도입하려 한 강국진의 의도는 나름대로 <가락시리즈>가 추구했던 것의 반대급부로서 완충시켰음을 알수 있다. 그것은 바로 종래 평면형식의 구조를 이야기구조로 전환시킴으로써 화면에서 단순히 선조구조의 구조적 매력이나 장점에 매혹되지 않고 화면을 다시 작가의 영감이나 잠재의식과 같은 체험들을 배우면서 진솔하게 토로하는 언어구조로, 요컨대 이야기를 통해서 체험적 현실들을 서술하려는 데 뜻이 있다.
강국진이 기존에 해왔던 선작업과 최근 내놓은 <역사의 빛>까지를 더욱 심층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 강국진이 걸어간 발자국을 따라가 보기로 한다.
강국진은 1939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이 전매청 공무원인 까닭에 어렵지 않게 소시적 꿈을 키웠던 것 같다.
그의 어린 시절의 미술적 재능은 남달리 다른 점이 없었다고 본인은 말한다. 그가 그림이란 장에 살을 부빈 것은 중학교 시절부터다. 1인1기를 교육정책으로 삼던 시절이라 강국진은 미술반에 들어가 물감번짐을 체험한다. 그 후 고등학교에 들어가 당시 정규미술교육을 받았고 경남여고교사로 재직해 있던 하인두 선생에게 사사한다.
[제가 미술을 하는 데는 저희 어머님의 지원이 크셨지요. 당시는 ‘환쟁이’라 해 작가들이 제 대접을 못받던 시절이었지요. 그러나 저희 어머니께서는 저의 재능을 인정하셨던지 물심양면으로 많은 용기를 주셨지요. 최근 투병생활 끝에 작고하신 하인두 선생은 저의 그림이 있기까지 많은 도움을 주셨지요. 당시 하 선생님께서 여학교에 근무하셔서 지도를 받으려면 토요일 방과후나 일요일에야 가능했습니다. 그 후 하인두 선생과 추영근 선생께서 운영하시던 <청맥화숙> 들어가 본격적인 그림공부를 했습니다.
졸업후에 남들처럼 대학엘 가지 않고 저 혼자서 그림공부를 계속했습니다. 미술교육은 대학의 정규교육이 필요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후 부산에 남아 4년 동안 소묘, 유화, 실크스크린까지 다양한 작업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친구들이 방학 때 내려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제 자신이 자꾸 무언지 모르게 답보된 상태임을 느끼곤 했습니다. 뒤늦게 서울로 상경해 친구집에서 함께 기거하며 입학준비를 했습니다. 당시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집안형편이 넉넉치 않은 형편이었지요. 그래 부산시절 익혔던 실크스크린으로 극장 포스터나 광고를 찍는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조달했습니다.
강국진은 1961년 혼잡스럽던 시절에 대학문턱을 들어서게 된다. 그는 부산시절 석고소묘, 뎃생이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러 대학 1~2학년 시절은 수업에 치중하는 것보다 학비와 생활비 마련을 위해 부업에 더 시간을 투자한다. 그때 함께 일하던 친구가 김차섭, 박형기 였다. 이들은 광고판과 포스터를 제작, 배고픈 시절을 달랬다. 대학 3학년이 되어서야 강국진은 학업에 정열을 쏟게된다. 그리고 외국 미술잡지의 작품사진이나 글 내용을 통해 서구의 앵포르말 미학을 접하게 되고 막연하게나마 동경하기 시작한다. 그는 이때 추상미술의 개념을 이해하고 소화를 위해 많은 시간을 가진다.
[저는 대학을 29살에야 마치게 되었습니다. 대학시절 교직을 이수해 교단에 들어서려 했으나 제 성격에 도저히 견뎌내지 못할 것 같아 학교 앞에 조그마한 화실을 차렸습니다. 이재에 밝지 못해 겨우 집세 낼 정도뿐이었지요. 그래 당시 다방, 카페 등의 인테리어디자인을 맡아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 후 충분한 자본을 만들기로 작정하고 명동에다 ‘Space designer” 라는 작은 공간을 마련했습니다. 사실 2~3년만 하다 그만두기로 한 것인데 술친구들이 많이 찾아 들어 이것도 저것도 아닌 술방으로 전락되어 버렸죠. 4년동안 그럭저럭 쇼윈도우 디스블레이도하고 실내장식도 맡아 일했죠. 그런데 잔금 등을 주지않아 큰 재미는 보지 못했습니다. 이때 배운 실력으로 지금 제가 살고 있는 집도 직접 설계했습니다. 그래 이것도 안되겠다 싶어 일명하여 <명동시절>을 마치고 합정동으로 화실을 얻어 이사를 했죠]
강국진에게 있어 <합정동 시절>은 커다란 의미를 부여한다. 그 당시 그는 김상유, 이상욱 씨를 초청해 우리나라 최초의 판화공방적 교육체계를 도입, 실시했기 때문이다. 당시 그는 실크스크린을 어느 정도 알고 있던 단계에서 김상유 씨의 권유로 판화를 접한 것이다. 그는 김구림 씨와 함께 인쇄소를 돌아다니며 공구를 준비, 판화기를 제작한다. 그 후 67년 여러 판화가들과 함께 최초 판화강좌를 그의 화실에서 갖게 된다. 그는 판화로의 입문과 동시에 평면작업을 떠나 입체 작업과 해프닝을 시도한다. 그가 평면작업을 떠나 한국 청년작가 연립전에 입체 작업과 해프닝을 발표한다. 이와 관련 미술평론가 유준상은 이렇게 설명한다.
사람의 자취란 결국 임의로 들어올린 곡괭이를 힘껏 땅 위에 내리찍어서 생기는 자취를 말하는 것일 게다. 이러한 자취야말로 어렵게 말해서 역사라는 것일 테고 그것은 임의로 들어올린 곡괭이를 수없이 내리찍는 반복으로 지속된다. 곡괭이를 들어 올리기 전에 이렇고 저런 자취로 찍어야겠다던가, 들어올리는 폼을 이렇고 저렇게 잡아야겠다던가, 꼭 1977번을 찍어서 자취를 만들어보고 싶다던가 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직까지는 없었다.
조상대대로부터 후손대대까지 그렇게 곡괭이질이 지속된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강국진, 그가 시도한 해프닝에서 보인 곡괭이질의 행동이 원시인과 다를 바 없는 야만의 일일지 모르겠으나 문명이 하나의 거대한 허구일지도 모른다는 점만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야만이 사실 (사실=이른바 리얼리티라고 씨부렁거린다나…)일지도 모른다는.]
강국진은 1965년 <논꼴>의 창립멤버로 가입하면서 그리지 않는 그림으로 해프닝을 시도한다. 그의 이러한 행위시도는 작가 의욕의 봇물터짐에서 기인된 실험정신에서다. 즉 여기에서 실험성이란 바로 실험적인 자아를 뜻한다. 주어진 현재의 상황을 넘어서 혁신적이고 의욕적으로 미래를 지향하려는 순간으로부터 현존의식을 싹 틔운다는 것이다. 현재상황을 뛰어넘으려는 게 말하자면 강국진의 예술의욕이 아닌가 싶다. 되새김질 한다면 창조하려는 작가의 열정과 행동하려는 징한 의지의 표현이 강국진의 예술세계의 다양성에 있어 절대적인 원동력이라 하겠다. 69년 그는 현장예술의 품이 없는 입체에서 다시 품을 남기기 위해 평면작업인 판화로 회귀한다.
[74년 <선작업>에 이르는 동안 많은 실험작업을 했습니다. 입체미술.환경미술은 아르바이트시절에 사용하던 재료들을 이용, 많은 시도를 했지요. 여기에서 저는 앵포르말을 극복하는 차원에서 평면작업을 추구하다 선조작업에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곧 앵포르말이나 해프닝에서 느끼지 못한 우리 것에 대한 애착을 늦게 나마 갖게 된 것이지요. 여기에서 태동된 게 <가락시리즈>고, <빛의 흐름>, <역사의 빛>이라 하겠습니다.]
강국진의 ‘캔버스는 색으로 덮인 평면에 불과하다’는 말처럼 그는 억지로 만들어진 화면보다 칠하는 자체에 뜻을 두는 회화의 가장 근원적인 모습에 충실 하려 한다. 계산된 화면구성과 우연성은 다같이 자기표현의 방법이지만 지적 판단력의 주체는 작가이니만큼 화면내의 유기적 관계가 형성되어야 할 것이라면 모든 방법을 수용하는 전향적인 수용자세를 그는 보이고 있다. 곧 이것은 열려진 마음의 열려진 시각이다.
역사의 빛 1989년작 65*50 평판화
보는 이들은 그의 작업이 구체적이지 않고 커뮤니케이션이 통하지 않는다 라고 말할 수 있다. [저는 제 자신을 어디까지 지탱해 나갈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많은 시간을 소비합니다. 작업의 정지와 더불어 결과된 현상을 놓고 그것이 이루어진 과정을 거슬러 올라가면 하나의 현상으로 어우러졌던 낱낱의 붓자욱들이 역순으로 제 자신과 작품과의 연관 지었던 어떤 결집을 상실해 나는 해체과정까지도 생각해 봅니다. 또한 최근 변화된 시도로서 <역사의 빛>은 그리는 저와 보는 이가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의 모색입니다. 선적구조에서는 그리는 이의 일방적 주장이라면 역사의 빛은 보는 이도 화면의 빈터에 자신의 해석을 기입할 수 있도록 한 것이지요.]
그의 <빛의 역사>에서는 구상적 요소가 등장한다. 강국진은 구상이다 비구상이라는 구분에 개의치 않고 작품에 필요한 요소라면 무엇이든지 끌어들일 듯한 자세다. 곧 그는 구체적 형상은 화면을 구성하는 조형요소일 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물의 모습일지라도 선과 면이 같은 요소로 취급되고 있으며 그러한 요소 하나 하나는 유기적 관계 속에 똑같이 놓여져 있다 곧 이것은 그가 표현한대로 ‘無償行 의 反 을 통한’회화적 요소의 등가성’이라 설명할 수 있겠다.
고전적인 견해에 따르면 인간 인식의 패턴을 구성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의 형식이라고 한다. 게스탈트의 정적인 지각형태는 이러한 공시적 대립과 공시적 균형의 법칙을 특징지우고 있으며 지난날의 미술작품에서 이러한 구성원리를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작가들은 더 이상 따르지 않는다. 고전작가의 관례처럼 자유롭게 일회적인 것을 찾아내는 데서가 아니라 객관적이고 무엇으로도 대항할 수 없는 구조 및 법칙을 발견하는 데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앞으로 제 작을 정진함에 있어 많은 비판이 따르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발전될 것인가에 대해서 선명한 비전은 보이질 않습니다. 허나 일련의 전개를 계속하다 보면, 제 자신이 만족함과 함께 더 나아가서는 새로운 이즘을 태동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현대작가에게 있어 자기 작품의 전승맥락에 있어 스승이 없음을 작가들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현대작가들은 미술 전체상의 흐름 속에 자신을 내던져 삼반 같은 평균감각으로 새로운 미술을 모색한다. 그것은 마치 망망대해를 떠 흐르는 것이기 때문에 그와의 간격이라든가 영법 혹은 속도 등을 상대적으로 가늠하여 자신의 목표를 정해야 하는 실정이다.
이 같은 실정은 현대인의 삶의 절약 같은 것이기도 하지만 자가 자신에게 있어서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아니 오히려 작가 자신이 여기에 더 민감한 지도 모른다. 이러한 맥락에서 강국진이 걸어온 길과 걸어가야 할 미지의 노정엔 고행이 예견된다 하겠다. 앞으로 새로운 작업을 시도하기 위해 그가 추구했던 과거의 청산은 과거와의 단절임과 함께 과거에 대한 도전이자 미지의 영역에로 자신을 내던지는 모험이라 하겠다. 그러나 강국진의 작품 성격에서 보여주듯 그는 과거에 안주하는 화가가 아니다. 그에게 있어 실험정신은 그의 미적 삶을 연장시키는 에네르기가 된다는 점이다.
강국진은 현재 한성대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 주변머리 없는 탓에 1978년에야 빡빡한 교직생활에 들어선 것이다.
[78년 한성대에 출강하면서 안정된 작품활동을 하게 됐습니다. 당시는 학교 앞에 화실을 얻어 작품활동을 했는데 봉급 받아 화실 집세 내고 재료를 사고 나면 거의 없을 정도였습디다. 그래 셋방살이를 전전하다 84년에야 현재 이 집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그동안 제 그림의 동반자가 되어준 집사람의 고생과 격려가 많은 힘이 되었습니다.]
강국진에게 있어 남달리 평가할 것은 판화작업에 있어서의 공헌이다. [60년대 우리판화는 거의 원시적 상태였습니다. 현 시점에서 많이 향상되었고 조형방법에서도 진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최근 들어 판화의 묘미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고무적이나, 작품경향에 있어서는 획일화 되어 있습니다. 곧 이것은 작가의 표현이 다양화되어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이것을 확대시키면 우리작가들에게 선비정신이 고양된 탓인지 자기분야만 지나칠 정도로 고수합니다. 조형영역의 확대를 위해서는 각 분야에 대해 작가들의 시도가 있어야 된다 생각합니다. 따라서 판화에 많은 애정이 있었으면 합니다. 특정인을 위한 작품보다는 대중이 함께 더불어 나눌 수 있는 판화의 대중화도 시급하다 하겠습니다.]
진정한 작가가 추구하는 스타일은 어떤 강렬한 특색있는 개인의 제작을 통해서 호흡하는 어느 막연한 정신일 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지 않는다면 단지 눈속임술의 형식에 불과한 지도 모르겠다. 강국진에게 있어서는 아른하임이 표한한 ’달라지기 위해 달라지려는 일시적인 욕구’는 보이질 않는다. 곧 이것은 작가자신의 가성과 산고 없이 소재만을 대치하거나 다듬는 일련의 충동적 기발함의 작태는 보이질 않는다.
강국진이 선조작업에서 15년 동안 일관된 관조에서 보여주었듯이 <역사의 빛>의 전환에서도 능동적인 의미의 창조성을 보여주고 있다 새롭기 위한 창조는 일련의 파괴를 수반하지만 이때의 파괴 이미지는 대상을 전면 거부하거나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확신하는 방식에 따라 오히려 대상을 관통해 나가는 것이다.
강국진은 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해왔고 앞으로도 많은 위험부담을 수반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를 감내하고 극복하기 위한 많은 실험들에 있어 성공을 쟁취하리라 믿는다. 하얀집에서의 즐거운 몇 시간은 많은 여운을 남겨주었다. 광주로 발걸음 하는 기자에게 바지자락 잡으며 한 밤 자고 가라는 그의 투박스런 정김이 못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