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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영 (철학박사. 공간1989.7)
국진은 70년대에 한국 현대미술의 형성작업에서 한 중견작가이다.
80년대 후반을 맞으면서 가진 이번 개인전은 조용하고 조심스럽게 변신의 기회를 모색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상당수의 중견작가들이 80년대의 후반에 들어와서 변화를 시도하고 있고 그것은 신세대의 활동 못지않게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15년여의 독특한 선 작업을 마무리하고 더 많은 변화를 추구하기 위해 구체적인 것 즉 형상적인 것을 화면에 도입하고 있다. 평자는 이런 평면형식의 구조를 이야기형식으로 전환시킴으로써 단순한 선구조의 매력이나 장점의 발현에 국한되지 않고 화면을 작가의 영감이나 잠재의식 그리고 현실생활의 체험들을 진술하고 토로하는 장으로 인식하는데 그 뜻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중견들의 조용한 변신
70년대에 입지를 이룬 작가들이 80년대에 들어와 어떠한 변신을 이룩하고 있는지는 우리의 특별한 관심거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원로급에 속하는 세대들이 변함없이 지난 날의 양식을 고수하고 있는 반면 상당수의 중견작가들이 80년대 후반을 맞으면서 조용히 변신의 기회를 모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가 어떠한 변신을 시도하고 있는지는 아직 구체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은 형편이다. 지금까지 80년대에 등단한 새로운 세대들의 이모저모가 중점적으로 거론되었을 뿐 이들의 윗세대로서 바로 지나간 10년대를 형성했던 중견세대들의 실상에 대해서는 거론조차 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한 이유로 해서 최근 중견세대들이 전환기를 맞아 나름대로 변화에 대처하고 새롭게 천착시키고자 하는 시도가 흔히는 베일에 가리어져 있다. 그러나 신세대들의 활동상 못지 않게 주목되어야 할 것이 또한 전 세대들의 활동상이 아닐까. 그들이 이 시기에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며 살고 있는지 그리고 그들이 이것을 작품으로 귀결시켜 가는 방법론이 무엇인지가 역시 검토되어야 하지 않을까.
중요한 것은 오늘이라는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가능한 많은 계층의 작가들이 보여주는 변화상을 광범위하게 그리고 면밀하게 고찰하는 일이다.
역사의 빛 1989년작 227.3*181.8 캔버스에 아크릴
평면의 해체를 위한 방법적 시도
작가 강국진의 경우를 특히 염두에 두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가 70년대 한국 현대미술의 형성작업의 제일선에 서 있었다는 것과 그러한 그가 87년을 기점으로해서 조심스런 탈바꿈을 시도해 오고 있는 바 50대작가로서 변모의 한 전형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73년에 첫 개인전을 가진이래 금년으로 11회의 개인전을 기록하고 있다. 자세하게 연륜으로 쳐서 15년을 한결같이 선조작업에 몰두하면서 <평면>을 선획들로 꽉채워 구조물로 만들고자 하는 일에 일념을 다하였다.
그러던 그가 87년부터 자신의 15년사를 마감하는 결정적인 시도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바로 이 점이 오늘의 중견세대들이 겪고 있는 변화상의 일례가 되지 않을까 싶다.
따라서 우리가 그에게서 찾아 볼 수 있는 변화는 그와 같은 많은 중견작가들의 최근 상황의 일단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70년대 초에 등단한 강국진의 경우 그의 최근 변화를 읽으려는 우리의 시도의 핵심은 물론 그가 근 20여 년을 선조로 채워진 <평면구조>를 어떻게 해체하고 있느냐 하는 데 모여져야 할 것이다. 나아가서는 그가 이 해체에 뒤이어 제시하려는 대안이 무엇인지에 초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평면구조의 해체작업에 관심을 가지려는 필자의 뜻은 다시 말하거니와 우리의 중견세대들이 지난 날에 공동으로 이룩한 업적이 근자에 이르러 구체적으로 어떻게 굴절과 변모를 겪고 있는지에 주목하는 데 있다. 이러한 취지는, 더 자세히 말해, 단순히 변모되고 있는 상황에 대하여 보고서를 작성하려는 데 있기보다는 이 변모가 어떠한 <방법론>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검토하려는 데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역사의 빛 1989년작 324*130 캔버스에 아크릴
<가락>시리즈가 시사하는 것의 재음미
이러한 시도에 있어서 그가 금번 제11회전에 내놓은 <역사의 빛>은 하나의 좋은 본보기가 되리라 믿어진다. 우연히도 그가 제시하고 있는 작품 <역사의 빛>은 그의 선조작업 15년사를 마감하면서 인식한 자신의 개인역사에 대한 통찰을 보여 주고 있어 이채롭다. 이 일련의 작품들은 85년까지 그가 즐겨 다루었던 선조작품들이 하나의 <가락>시리즈와 크게 궤를 달리 한다. 여기서 작가는 그가 십 수년간이나 전심하였던 일단의 작업들에다 괄호를 쳐두고 진실로 자신의 미래를 새롭게 설계할 <역사의 빛>을 기도하기에 이르렀다고 할 것이다. 어떻게 그가 이 과정에 도달하였는지에 대해서 계속해서 언급함으로써 그의 <역사의 빛>의 의의가 밝혀지리라 생각한다.
전기한 선조작품의 하나인 가령 <가락>시리즈를 통해서 그가 보이고자 한 것은 <선조>가 우리 민족의 고유한 기질에서 발현된 것이고 이 발현이 현대라는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사람인 작가를 통해서 재해석될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가락>의 경우 이러한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이 바로 <긋는 행위>를 반복하는 일로 나타났다.
긋는 행위의 반복을 통해서 얻고자 한 것은 선을 화면의 상하로 그음으로써 흔히는 다양한 색조의 길쭉한 선들의 이음새로 화면 전체가 채워짐으로써 드러나는 <평면구조>였다. 녹색, 연갈색,암바, 퍼플, 코발트, 크림슨레이크, 오커 등 거의 모든 색상들을 즐겨 쓰는 그는 이 색깔들을 붓으로 칠하는 대신 긋는 일의 반복에 의해서 평면구조를 만들고자 했다. 화면의 구조를 <선조>의 고조로 해결하려는 착상은 <선조>의 집합 전체의 배면에다 산, 언덕의 능선이나 도식화된 패턴, 파선, 대칭선, 마름모꼴, 때로는 산과 나무와 같은 한국의 산야와 전승문화재의 요소를 배열하고 암시함으로써 이것들을 배경으로 이루어지는 <선조>들이 그것들의 특성을 보다 잘 드러내리라는 결론을 얻었다. <선조>적 특성에 의한 화면의 <평면적>해결은 작품으로 하여금 <선조>에 의한 평면의 고유한 <기질적 발현>을 야기하도록 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이 발현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집합적인 기질을 작가가 자신의 체질적 개성에 의해 번역할 수 있는 방법적 계기요 따라서 이로부터 하나의 보편적인 자기표현의 방법이 가능하리라 믿었다. 이처럼 자기표현의 방법을 <선조>구조와 이를 지탱해 주는 캔버스와 색료, 그리고 평면과 같은 일차적 조건들, 요컨데 지지체들의 구조적 통일에 의해 해결하려고 한 것이 바로 <가락>시리즈였다.
<빛의 흐름>이 시사하는 새로운 방법론
<가락>시리즈는 바로 이러한 결과의 작품들이었다. 그렇다면 작가는 이 결과로부터 다음으로 이어질 <역사의 빛>을 준비하기 위해 어떠한 <방법론>을 의식하고 있는가.
먼저 고찰해야 할 것은 작가가 자신의 새로운 방법론에 이르기 위한 시작을 어떻게 설정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가락>시리즈의 탐색이 갖는 한계를 검토하는 데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이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착상하는 데 착수했다고 할 것이다.
가락 1988년작 72*90 캔버스에 오일 개인소장
<가락>시리즈에서 명백해진 것은 민족의 집합적 정신 또는 작가의 개성적 기질성의 모색은 화면이 가지는 지지체적 특성과 이 특성을 특히 <선조>구조로 번역하려는 부단한 시도를 통해서 성취될 수 있으며 이미 15년여에 걸친 시도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방법의 탐색은 <가락>시리즈에서 얻어진 결말 위에서 비롯된다. <역사의 빛>은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시작되었다. 이에 앞서 하나의 과도기적인 이행과정이 87년의 석판화전(우정미술관)에 출품된 <빛의 흐름>시리즈에서 발견된다. <빛의 흐름>이 나타내는 특징적인 면모는 종래의 <가락>시리즈가 보여준 섬세한 <선조>구조를 과감하게 해체해서 굵고 짧은, 전혀 불규칙한 선 획들, 원, 사각형, 마름모, 점묘 따위와 같은 복합적인 요소들로 이루어지는, 보다 자발적이고 우연적인 효과를 기대하려는 데 있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빛의 흐름>은 명백하게 말해 <가락>의 형식을 해체한 것이다. 사실상 지금부터 다루고자 하는 <역사의 빛>은 이러한 해체의 방법으로 본격적으로 시도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여기서 평면은 그것의 구조적 의미에 있어서 결국 소멸되는 데 이르렀다. 화면을 지지체의 조건들의 합으로, 특히 강국진의 경우, 123들의 집합으로 이해하려 함으로써 <평면구조>를 화면의 실질로 간주하려 하였던 생각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역사의 빛>과 이야기
금번 제11회전에 선보인 <역사의 빛>시리즈는 일단 <빛의 흐름>이 앞질러 보여 주었던 것처럼 첫째는 평면구조를 해체하려는 절차와 둘째는 이 절차에 뒤이어 무엇인가를 이야기 하려는 행위의 표현절차를 삽입하려는 시도를 함께 보여준다. 먼저 해체하려는 절차는 종래와 같은 미세 정교한 필선 들에 의한 평면구조를 대범하고 분방한 선들로 분해하고 그 위에다 삼각형, 사각형과 같은 도상들을 도입함으로써 흡사 60년대 앵포르멜의 기분을 재현하려는데 경도되었다. 자유와 우연이 놀이의 요소를 동반하면서 힘을 저장한 가장 분방한 결과를 연출하려는 것이다.
해체의 절차에 뒤이어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려는 절차로 이어지는 과정은 화면을 좌우 이등분해서 왼편에다 예컨데 기마상이나 옛 한국화에 등장하는 바위, 부적에 나오는 독수리, 불상 등을 그리되 오른편에는 가령 나무숲, 꽃, 무지개, 화려한 환상의 풍경을 연상케 하는 다소 복합적인 도상들을 삼각형이나 사각형, 원이나 곡선, 대각선과 함께 조합함으로써 처리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루어지는 화면절차는 종래의 다색에 의한 <선조>구조의 느낌을 지속시키는 듯 하면서도 종전의 미세구조(선조에 의한 평면)을 과감히 부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에서 과거의 역사 속에 있었던 것들, 가령 왼편의 주제들을 현재의 시공간에서 볼 수 있는 것들, 혹은 화면 오른편의 주제들과 대조시킴으로써 진술하고자 하는 말하자면 내심의 이야기를 보여 주려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야기의 절차에 있어서 왼편의 기마상은 이것을 잘 그려 보이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과거의 시각적 상황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려지고 있으며 이에 대응하는 오른편의 풍경 또한 이것에 의해서 현재의 시간적 상황의 하나를 나타내기 위해서만 다루어지고 있다.
이야기구조와 생활세계의 부활
이와 같이 임의의 도상들로 이루어진 <이야기구조(narrative stucture)>는 종래의 <선조>들에 의해 이룩된 형식구조와 커다란 차이를 보여준다. 이야기구조는 근본적으로 과거에 대한 현재, 밝음에 대한 어둠, 복잡한 것에 대한 단조로움, 낡은 것에 대한 새것 따위와 같은 대립적 상황들의 <종합(synthesis)>을 시도함으로써 이루어지고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도상을 빌리지 않고 단순히 색면과 약간의 <선조>를 동반해서 아주 단순한 대조를 보임으로써 종합을 시도하는가 하면 이 경우는 특히 명과 음의 대조에 의한 종합이다. 또 다른 경우에는 가령 녹색바탕에 불상을 그려 명상하는 자태를 이와 대조적인 복합적인 상황과 결부시켜 간단히 단순성과 복잡성의 대비구조를 이야기형식으로 보이려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이야기구조가 지향하는 것은 종래의 <선조>에 의한 평면구조와 근본적으로 무엇이 다른가. 이야기구조는 작품으로 하여금 작가의 내심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데 참뜻이 있다. 그것은 내심의 메시지를 이루며 메시지의 내용이 되는 <생활세계>(life-world)에 관련된다. 종래의 평면구조가 메시지의 내용이 되는 작가의 생활세계를 모조리 사상하거나 은폐시킴으로써 화면을 형식화시키려는 데 집착했다면 이야기구조는 거꾸로 이러한 형식화의 시도를 거부하고 타파함으로 생활세계를 회복시키고자 한다.
생활세계를 이야기하는 <화자(narrator)>로서 작가가 적극적으로 작품의 주변에 등장하며 불특정한 다수의 <피화자> 즉, 관객의 참여를 허용한다. 종래의 평면 자체내의 은폐로부터 타자를 향한 개방이 두드러진다. 우리의 문화적 전통양식에서 찾아지는 도상들의 커뮤니케이션을 용이하게 하기위해 재등장하며 색상들이 그와 비슷한 이유와 동기에서 도입되었다. 뿐만 아니라 오늘의 삶을 지탱해 주는 주변내용들이 대조를 통해서 종합되거나 삽입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역사의 빛>이 보여주는 것은 형식이나 구조의 무 시간적, 무 공간적 정적을 넘어 현실 속에 존재하는 삶의 시공간적 울림 그 자체이다. 강국진은 마침내 어려운 곡예를 여과해서 또 하나의 변모의 첫 시작을 기도하고 있는 셈이다. 그의 언급처럼 <가능한 한, 종전과 달리 더 많은 변화를 추구하기 위해 구체적인 것, 말하자면 형상적인 것을 도입하려 했다>는 말의 진정한 뜻은 아마 이상에서 우리가 고려한 바와 같은 이야기구조의 근본 원리로부터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요컨대 평면형식의 구조를 이야기형식으로 전환시킴으로써 단순한 선구조의 매력이나 장점의 발현에 국한되지 않고 화면을 작가의 영감이나 잠재의식 그리고 현실생활의 체험들을 진술하고 토로하는 장으로서 인식하려는 데 <역사의 빛>이 갖는 참뜻이 존재한다. 누구에게나 근본적이고 새로운 변화를 기도한다는 것은 모험이기도 하다. 때로는 이 모험이 작가에 따라서는 위기로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많은 뜻있는 시행착오를 동반한 부단한 노력이 결국 위험부담을 감소시켜 줄 것이다.
15년여의 선 작업을 마무리하면서 또 한번의 변신을 도모하려는 강국진의 용기는 다시 말하거니와 현재에도 우리의 중견세대의 작가들이 건재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좋은 표본이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