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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준상 (미술평론가. 1995.07)   
국진을 처음 알게 된 건 30년 전 논꼴이었다. 논꼴은 서대문 밖 무학재 너머의 홍제동에 있었던 마을 이름이며, 그 일대가 논이었기에 그렇게 불리었다. 당시 이곳은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으며 드문드문 초가집과 스라브 지붕이 보이는 매우 한적한 마을이기도 했다. 그리고 바로 이웃에 화장터가 있었으며, 저 멀리 누렁 길로 구슬픈 가락과 만장이 나부끼는 상여 행렬이 지나가던 곳이었다. 이러한 마을에 이층으로 지은 간소한 집 한 채가 외따로 있었는데, 강국진 등 홍익대에서 서양화를 배운 동기들이 이 집을 빌려 공동의 아뜨리에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들을<논꼴>이라고 불렀다. 참고로 당시의 동기들을 기억나는 대로 말하면 한영섭, 최태신, 김인환, 이묘춘 등과 얼마 전에 타계한 정찬승이었다. 한편 여기서 제작한 작품을 가지고 65년<논꼴>창립전을 열게 되고 한국미술계를 구성하는 하나의 미시사회로 <논꼴>은 부상하게 된다.
진주 태생인 강국진은 과묵한 사나이였다. 동인들이 열띤 예술 논쟁을 벌리는 가운데도 외따로 떨어져 묵묵히 경청하는 태도로 일관하는 게 그의 성격이기도 했다. <논꼴>창립 당시 강국진은 자신의 작품관을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었다.
<내 작품의 대상은 객관적으로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내재적 심상속에 있으며 이것을 발굴 표현하는 게 나의 작업이다.> 당시의 그는 20대 후반이었으며, 이 말에서 그의 예술관이 당시의 세계 미술을 풍미했던 실존주의적이고 네오 로맨티시즘적인 이른바 표현주의에 경도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고 하겠다. 주지 하듯이 표현주의는 주관적인 형식에서 보다 정신적 내면의 의미 부여를 추구하는 예술이기 때문에 규범적인 건 아니다. 여기서의 규범은 개인 사상의 은밀하고 강렬한 표현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가락 82 1982년작 102*145.5 캔버스에 오일
강국진은 이러한 자신의 내면 세계를 <나의 특유한 생활에서 오는 체념(諦念)이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주지하는대로 유럽의 표현주의는 민족적 컴프렉스가 현저하게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던 20세기의 대표적이 경향이었으며, 주로 게르만이나 스라브 민족들인 북방 민족에 의해 시도되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이 경향은 미술사적으로 오랜 침묵을 강요 당했던 북방 민족의 분출이었기에 격정적이면서 비극적이고 인간 고뇌로 넘치는 것이었다. 이러한 선례와 비교해볼 때 강국진의 표현(表現)은 그의 말처럼 "체념"의 내포를 흔적으로 나타내보려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30대 중반에서 40대 말까지 일관하여 몰두했던 <선(線)>, 또는 <가락>시리즈가 그것으로서 가느스름하고 기름하게 토막 진 것 같은 수직의 선조(線條)들에, 화면의 전체상(全體像)을 구성하는 무한대의 단위로 등장하고 있었다. 그의 이러한 경향은 「마크 토비」와의 유사성 또는 "전면을 덮어 씌운다"는 뜻의 "올오버네스" 와 연고성이 있는 것으로 고려될 수 있다. 이 "올오버네스"는 전후미술의 특징적인 경향이었으며, 50년대의 「폴록」이 자신의 화면 전체를 흘리고 뿌리는 기법으로 구성했던 게 선례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의 이론은 이른바 "전체론"(홀리스틱)이라는 거며, 한 화면 전체는 그것을 구성하는 단위 또는 부분의 총화보다도 존재가치가 있다는 발상에서 연유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발상은 "표현"이라기 보다 "존재"로서 사물화 시킨다는 「스텔라」혹은 「져드」의 경향을 낳게 된다.
선 1975년작 72.5*90.5 캔버스에 오일
바다를 하나의 전체라고 할 때 그 전체를 구성하는 하나의 단위는 물이다. 아니 물이라기보다 물의 단위인 원소이다. 상대적으로 말하면 이러한 원소들로 빈틈없이 채워진 전체를 바다라고 우리는 인식한다. 이러한 전체상으로서의 바다는, 늘 일정한 것이 아니다. 노도질풍의 사나운 전체로 휘몰아치다가도, 잔잔하고 고요함의 전체로 가라앉는다. 그러나 어느 경우이건 그 전체를 구성하는 하나의 단위인 원소는 변하지 않는다. 이처럼 변하지 않는 단위들로 변환(變換)을 일으키는 게 노도질풍이라는 전체상이자 해맑은 고요함의 전체상으로서의 바다이기도 하다. 이러한 전체상으로서의 짜임새, 곧 "전체(全體)는 독립적 요소(단위)로부터 성립되지만, 요소는 체계(시스템) 그 자체를 특징짓고 있는 법칙에 따른다."는 구조(構造)적인 관찰은, 근대 미술사에 있어서는 「세잔」이 선구자였다. 회화의 화면이 전체성을 이러한 체계(패러다임)로 분화해서, 수직과 수평의 요소만으로 전체를 구성한게 말하자면 그의 작품이었다. 그러니깐 그의 회화는 무엇을 표현하고 기록했다기 보다는 그 무엇이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탐색(retrieval) 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발상은 이후의 미술가들에게 이어지며, 강국진도 의식했건, 안 했건 간에 같은 인식유형의 후예였던 것이다. "탐색(探索)은 실상(實相)을 더듬어 찾는다."는 걸 뜻한다.
강국진의 '선"과 "가락"은 이상에서 예시한 전체를 구성하는 요소로서 등장했던 것인데 그의 전체상은 오히려 베틀의 구조를 연상시키고 있다. 그런데 그의 전체는 날실만 있고 씨실이 없다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생전의 그는 자신의 작업을 "무상행위(無償行爲)의 반복" 이라고 말했는데 앞에서 인용한 "체념"이 이러한 행위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베는 날실과 씨실로 짜여지는 전체이며 베틀은 이것을 구성하는 매카니즘 이라고 하겠다. 강국진의 관심은, 그러나 이러한 무인칭의 메카니즘에 있었던 게 아니었다. 베틀 앞에 앉은 한국적 심성이 자신의 임의(任意)를 거기 일임하고, 오로지 무상한 일념으로 날실 사이로 씨실의 북을 풀어 넣는 "무상행위"에서 자신의 작가적 태세를 더불어 느껴보려 했을 거며 스스로가 날실이 되어보려 했던 게 아닌가 생각해보고 싶다.
근대적 세례를 입은 미술가란 표현으로서의 회화보다도 존재로서의 회화를 추구하는 입장이라고 하겠다. 회화는 단층(斷層)인 평면구조의 형식을 가리키며, 여기에 무엇을 어떻게 왜 그려야 하는가… 의 문제는 그들의 선배가 거듭 답습했던 관례였다. 이러한 관례를 부정하고 존재로서의 회화를 처음 시도 한게 「세잔」이며, 근대적 세례란 이러한 시대적 세례를 뜻한다고 말할 수 있다. 존재로서의 회화란 어떤 환영(일류젼)을 가르키는게 아니며, 그러한 환영의 입지 조건이라 할 수 있는 평면의 물성적 구조부터 검색한다는 걸 말한다. 이 경우 그러한 물, 가령 캔버스의 단층구조 그 자체보다도, 그것을 인식하는 인식의 메커니즘은 그러면 어떻게 조성되는가의 문제가 제기된다고 하겠다. 말하자면 인간의 인식구조는 가령 그 언어구조(言語構造)가 그렇듯이 거기에는 어떤 의미(意味)가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서로 뜻을 교환하는 언어행위라는 게 그것이다.
점 1977년작 72.5*9 혼합재료
70년대 초의 강국진은 이러한 의미론(意味論)의 입장에서 사물을 관찰하기 시작하며, 이제까지의 경향하고는 전혀 다른 자세로서의 강국진을 보여준 바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작품은 돌과 끈 또는 목재와 지면(紙面)등으로 구성되었기에, 현재 작품 자료로 보관되어 있는 게 별로 없는 게 아닌가 기우된다. 다행이 이러한 경향을 전시했던 명동화랑(1973년)의 캐털로그가 남아있어 참고할 수 있다.
한편 이러한 강국진의 일면은, 그가 기술적인 또는 몰제작적인 예술가 유형이기보다 어떤 관념성을 중시했던 작가였음을 회상하게 된다. 바위 같은 인상이 늘 한일자로 입을 다물고 이따금 눈을 꿈뻑 거리던 생전의 모습에서… 이러한 그는 개념예술의 한 유형으로 간주될 수 있겠으나, 이 경우보다 광의(廣義)로서의 개념예술을 지향했던 게 그가 의식했던 예술가 태도였다고 하겠다. 60년대 말 정찬승과 몇 차례 시도했던 행위예술에서 이러한 그의 예술태도를 감지할 수 있겠는데 그러한 그의 행위는, 그의 경우 퍼포먼스인 것이었다. 인식(認識)의 근원은 무엇을 인식하는 패턴으로부터 유발되는 거며, 그 패턴은 어떤 형태(여기서 살아있는 강국진의 신체의 행위)를 근거로 해서만 시원적으로 조성된다고 하겠다.
여기서 말하는 '형태'는 영어의 '포름'을 뜻할 수도 있겠지만, 본래의 뜻은 어떤 모양이나 형식을 가리킨다기 보다, 인간이 의식하는 "개념"이라든가 "관념"인 인식의 유발원(誘發原)을 가리킨다. 가령 과학자가 인식하는 "포름"은 분자나 원자의 세계이며 우리는 그 "포름"을 "기호"로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기호는 사물(事物) 그 자체는 아니다. 이러한 인식의 레벨은, 과학자의 "기호"가 설명의 도구라면 예술가의 "기호"는 표현의 도구라고 하겠으며, 모든 기정 사실을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하는 다다이즘의 후예인 현대 작가들이 표현의 도구는 어차피 그의 "포름"인 신체일 수 밖에 없다. 또는 그 신체가 취하는 행위 곧 "퍼포먼스"의 역사적 당위인 것이었다. 생전의 그가 "무상행위의 반복"으로 수 없이 그어 내린 수직의 가락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된다고 하겠다.
80년대를 전후한 강국진은 전부터 관심이었던 판화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며 숙원이던 판화공방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그의 최상의 이해자이며 반려인 황양자와 안영의 생활공간을 꾸미게 되며 이제까지의 실험적이고 지원병(志願兵)적인 태세를 청산하고 현역(現役)으로서의 진면목을 과시하려던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