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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영 (미술평론가, 철박)
의 제 11회전의 새 변모(變貌)에 즈음하여 작가 강국진이 그의 대망의 11회전을 맞아 마침내 새로운 변신을 시도하려고 한다. 73년에 첫 개인전을 가진 이래 15년을 한결 같은 집념으로 선숙 작업에 몰두해 온 그가 87년부터 서서히 탈바꿈을 꿈꾸던 끝에 88년과 금년에 이르는 지속적인 실험을 통해 마침내 하나의 새로운 <방법>을 착상하는데 이르렀다.
그가 내놓은 근작<역사의 빛>은 그의 최근의 이러한 새로운 착상의 첫 실험적 결과를 보여준다. 이 일련의 작품들은 85년까지 그가 즐겨 다루었던 선숙 작업의 하나인 <가락>시리즈와 크게 궤를 달리한다. 그는 이제 10수년간을 전심을 다하던 일단의 작업들에다 괄호를 매겨두고 진실로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새로이 설계하기 위한 '역사의 빛'을 찾아 나서기에 이르렀다.
역사의 빛 1989년작 227.3 *181.8 캔버스에 아크릴
우연히도 그가 내놓은 새로운 작품의 명제인 <역사의 빛>은 그의 선조작업 15년사를 마감하면서 깨달은 작가 자신의 역사에 대한 통찰의 마음을 담고 있어 주목된다. 그것은 그가 한국미술의 전통 내지는 진수라 믿었던 '선숙성-Iinea-rity'의 현대적 표현에 관련된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천착하던 끝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러한 과정이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 계속해서 언급함으로써 그의 <역사의 빛>의 의미가 밝혀지리라 생각한다.
선조성의 현대적 표현에 관련된 문제들에 관한 한, <가락>시리즈가 보여주고자 한 것은 '線?'가 우리 민족의 고유한 기질에서 발현된 것임과 동시에 이 발현이 특정한 시간인 '현대'(또는 '현재')에 살고 있는 특정한 '개인' 을 통해서 또한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이 가능성을 작품으로 옮기는 절차로서 그가 선택한 것이 칠하는 대신 <긋는 행위>를 반복하는 일이었다.
긋는 행위의 반복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은 화면의 상하로 그어지는, 흔히는 다양한 색조의 길쭉한 선들의 이음새가 평면전체의 <구조>를 결정한다는 것이었다. 녹색, 연한 갈새, 암바, 퍼플, 코발트, 크림슨레이크, 오커 등 거의 모든 색상들을 즐겨 다루면서 이것들을 붓에 의한 선으로 그어서 평면을 채울 수 있는 만큼 가득히 채우는 일이 긋는 행위의 반복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화면의 구조를 선조의 구조로 해결하려는 그의 착상은 세부적으로는 이러한 선조구조의 배면에다 언덕이나 산의 능선. 도식화된 파선, 대칭선, 마름모꼴, 때로는 산과 나무 등 우리의 산야와 전승문화재의 일부 형태를 배열하고 암시함으로써 이것들을 배경으로 해서 그어지는 선조구조가 그것의 '선숙적 지성' 에 있어 보다 더 명료해지는 효과를 얻는데 이르렀다.
선조적 특성에 의한 화면의 <평면적> 해결은 작품으로 하여금 선숙에 의한 평면의 고유한 <기질적 발현>을 성공적으로 가져오도록 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이 발현은 물론 집합적인 것과 작가 개인적인 것의 융합이라는 점에서 하나의 보편적인 자기표현의 방법이라 생각되었으며 이러한 자기표현의 방법을 특히 선조구조와 이 선조구조를 지지해 주는 캔버스와 색료, 그리고 무엇보다 평면이라는 조건 등 일체의 지지체의 구조적 통일에 의해서 해결하려 하였던 점에 특징이 있었다.
<가락>시리즈는 이러한 결과의 작품들이었다. 그렇다면 작가는 이렇나 결과에서 그 다음으로 이어질 <역사의 빛>을 준비하기 위해 어떠한 통찰을 자신에게서 발견하고 있는가. 그것은 선조구조와 평면구조의 일원화에 의해 선조성의 정신적 발현이 충분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민족의 집합적 정신이나 작가의 개성적 기질성은 화면이 가지는 지지체의 특성과 이 특성을 선조구조의 특성으로 탈바꿈시키려는 부단한 기도를 통해서 잘만하면 성공적으로 드러내어질 수 있고 그것들의 융합에 의한 정신적 발현이 '현재적으로' 가능하고 또한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역사의 빛 1991년작 162*130 캔버스에 아크릴
<歷史의 빛>은 이처럼 <가락>시리즈에서 결론지어진 결말 위에서 시작한다. 그 하나의 과도기적인 이행과정이 87년 우정미술관에서 가진 석판화초대전에 출품된 <빛의 흐름>연작들에서 발견된다.
이 작품들에 나타나는 특징적인 면모들은 종래의 섬세한 선조구조를 과감하게 해체하면서 굵고 짧은 불규칙한 선 획들과 원. 사각형, 마름모꼴, 점묘들과 같은 복합적인 요소들이 이루는, 보다 자발적이고 우연적인 효과를 드러내고 있다.<빛의 흐름>은 명백히 <가락>의 구조를 '해체적'으로 처리한 것이었다. 사실상 <역사의 빛>은 이러한 해체의 방법을 가지고 필자가 지금부터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 구조>로 발견 시키려는 데서 시작되었다.
따라서<역사의 빛>은 빛의 흐름>이 보여주고 있는 <가락>의 구조를 해체하는 절차와 이 절차를,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려는 구조로 바꾸어 놓으려는 시도를 함께 보여준다. 해체하려는 절차는 종래와 같은 미세 정교한 필선들의 선조구조를 대범하고 비 정교한 선들로 분해하고 여기에다 삼각형, 사각형 등 면적인 요소들을 도입함으로써 흡사 그의 60년 앵포르멜 시대의 상황을 재현하고 있는듯하다. 자유와 우연이 놀이적인 요소를 동반하면서 힘을 안들이고 가장 분방스러운 결과를 연출하는듯한 분위기에 이르고 있다.
해체하는 절차가 다시 이야기하려는 절차로 이어지는 과정은 화면을 좌우로 이등분해서 왼쪽에다 예컨대, 기마상이나 옛 한국화에 등장하는 바위, 부적에 나오는 독수리, 불상 등을 그리되 오른편에는 예컨대 나무숲이나 꽃, 무지개, 화려한 숲, 풍경 등을 연상시키는 다소 복잡한 도상들을 삼각형이나 사각형, 원이나 곡선, 대각선들을 도입함으로써 처리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처리하는 화면절차는 흡사 종래와 같이 일견 다색의 선숙구조를 실현하듯 하면서도 종전의 미세구조(선조구도)를 과감히 부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과거에 있었던 것들(즉 왼편의 주제들)과 현재 볼 수 있는 것들(즉 오른편의 주제들)을 대조시킴으로써 <형상들의 이야기>를 구성하려는 시도로 나타나고 있다. 이 경우 가령 기마상은 기마상을 자 그려 나타내고자 함이 아니라 단지 과거의 정황을 표상하기 위해서 그려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기마상에 대응하는 오른쪽의 풍경 또한 단지 현재의 정황을 나타내도록 하려는 데서 배려되었다.
역사의 빛1989년작 227.3*181.8 캔버스에 아크릴

이와 같이 형상들의 이야기구조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 작품의 구조는 전적으로 종래의 선조에 의한<형식구조>로부터 형상에 의한 <이야기 구조>로 전환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야기구조는 근본적으로 과거VS현재, 밝음VS어둠, 복잡VS단순, 낡은것VS새것 따위와 같은 대립적 상황들의 <통합>을 모색함으로써 이루어지고 있다. 어떤 경우에는 형상을 빌리지 않고 단순히 색면과 약간의 선조들을 동반한 가장 단순한 색면대조를 보이는가 하면 - 이 경우는 특히 明과 暗의 대조와 통합을 이야기 하려는 것이다. - 가령, 왼편의 녹색바탕에 불상을 그려 명상하는 자태의 단순성을 나타내고 이와 대조되는 복잡한 상황을 오른편에 배열하는 경우와 같이 단순성과 복잡성의 이야기구조를 극히 종합적으로 얻으려는 경우도 있다.

가능한 한, 종래와 달리 더 많은 변화를 추구하기 위해 구체적인 것, 형상적인 것을 도입하려 했다' 고 말하는 작가의 진정한 의도는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가락>시리즈가 추구했던 것의 반대급부에 이미 도달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종래의 평면형식의 구조를 이야기구조로 전환시킴으로써 화면에서 단순히 선조구조의 구조적 매력이나 장점에 매혹되지 않고 화면을 다시 작가의 영감이나 잠재의식과 같은 체험들을 가볍게 그러나 진솔하게 토로하는 언어의 구조로, 요컨대 이야기를 통해서 체험적 현실들을 서술하려는 데 뜻이 있다.
강국진은 마침내 어려운 곡예를 통해서 자신의 또 한번의 변모의 역사의 첫 시작을 이룩하고자 한다. 누구에게나 근본적으로 새로운 변화를 기도한다는 것은 모험에 속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많은 시행착오의 위험부담이 수반될 것이지만 이를 감내하고 극복하기 위한 많은 실험들이 결국 성공을 쟁취하고야 말 것이다.
15년의 선 작업을 마무리하면서 그가 다시 변신하고자 하는 의지로써 내놓는 <역사의 빛>은 그의 그러한 최근 성취의 일단을 앞질러 보여줄 것으로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