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평론 > 평론 2   
오광수 (미술평론가. 1965~1974)   
국진의 작가로서의 활동은 65년 논꼴 동인의 결성과 발표로부터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논꼴 동인은 65년 홍대 졸업생들이 중심이 된 단체로 그 구성 요원은 강 국진을 비롯해 정찬승, 김인환, 한영섭, 남영희, 최태신, 양철모 등이었다. 이들 그룹 형성은 같은 교실에서의 의기투합과 그것의 보다 진전된 정신적 공동체로서 집단 제작실을 경영하면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이었다.
논꼴이란 그룹명은 집단 제작실이 있던 무악재 너머 홍제동 화장터 근처의 옛 지명에서 따온 것이었다. 65년 졸업반이었던 이들이 한 곳에 집단 제작실을 마련하여 생활과 제작을 같이 했다는 것은 단순한 젊은 열기로만 이루어진 것이기보다는 이념의 공동질을 모색했던 치열한 의식에서 가능할 수 있었지 않았나 생각된다. 나도 이 시절 그들의 술자리에 가끔 참여 한 적이 있는데 언제나 그 토의 방식은 뜨거웠고 진지했다. 무엇을 어떻게 결론 내린다기보다 각자 지니고 있는 예술에 대한 뜨거운 욕구들을 무차별하게 쏟아놓는 자리였다. 때로는 조용조용 얘기가 전개되다가도 때로는 걷잡을 수 없는 격론에 휩싸여 감정들을 가누지 못할 때도 한 두번이 아니었다. 적어도 논꼴이란 그룹은 이런 내막을 통해 결성된 단체였다.
논꼴 창립전은 65년 2월 신문회관에서 열렸다. 이 때 펴낸 <논꼴 아트>는 일종의 동인지 겸 창립전 카다로그로 대용된 것이었다. 여기에 나와있는 선언문을 보면, 대단히 추상적이기는 하나 현상을 극복하려는 그들 나름의 의욕이 간단없이 표명되어지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여기 전문을 옮겨본다.>
<일체의 타협의 형식을 벗어나는 시점에서 우리는 항시 자유로운 조형의 기치를 올린다. 1)새 세대에 참여하는 <자유에의 의식>을 우리의 조형 조건으로 한다. 2)우리는 극단적 시간의 창조적 변화를 조형윤리로 삼는다. 3) 기성의 무분별한 감성에서 벗어나 지성의 발판에서 형성의 모랄을 추구한다.>
창립전에 출품한 강 국진의 작품은 6점으로 <작품>으로 명제가 통일 되었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말하는 자리에서 <나의 직시된 인간상의 모순, 이것을 강한 선, 가열된 바탕, 부정의 세계를 뚫고 폭발하는 무수한 기호형에서 오는 직열(直列)된 감정, 이것이 나의 캔버스 위에서 표현 구축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표명하고 있단. 다소 생경한 언어의 표명이 엿보이기는 하지만 강국진의 당시 작품에 대한 자기의 변으로서는 상당히 정곡을 찌른 표현이었지 않나 생각된다. 그만큼 화면은 강인한 선조의 폭발하는 구성력에 지탱된 인상을 주었으며 그것이 점차로 기회적 성향을 띠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의 작가변에 비교적 상세히 기술되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해 66년에 열린 2회전에서도 그의 작품성향은 창립전 때와 그대로 맥락 되면서 보다 단순화된 선조의구성과 부드러운 색조의 톤이 곁들여지고 있다.
형의상관 1973년작 로프, 천
논꼴 동인전은 2회전을 끝으로 열리지 않은 것으로 기억 되는데, 졸업을 하고 멤버들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더 이상 그룹으로서 지탱이 어려웠기 때문으로 본다
그러나 67년 청년작가연립전으로 이어지면서 논꼴의 몇몇 멤버들이 중심이 되어 새로 탄생 시킨 것이 <신전동인>이었다. 강국진, 정찬승, 김인환이 논꼴 멤버이다. 신전동인은 청년작가연립전을 위해 만들어진 그룹이라 할 수 있는데, 이상의 세 사람의 논꼴 멤버 외에 양덕수, 정강자, 심선희가 참여하고 있다. 청년작가연립전은 기별로 홍대 63년 졸업생, 64년 졸업생이 주축이 된 무 도인, 오리진 동인, 신전 동인의 세 단체의 합동전을 가리킨다.
여기 참고로 그 멤버들을 기술 해보면, 무도인에 최붕현, 김영자, 이태현, 문복철, 임단(임명진), 진익상, 오리진 동인에 최명영, 서승원, 이승조, 김수익, 신기옥, 최창홍, 이상락, 함종섭, 그리고 신전 동인은 앞서 든 6인이다. 무동인은 62년 1회전을 가진 바 있으며, 현대미술의 실험이란 2회전을 가진 이후, 연립전 참가가 3회인 셈이다.
멤버 가운데 새롭게 영입한 임단, 진익상은 홍대 출신이 아니면서 연립전의 기획에 적극 동조하므로서 참가한 이들이다. 임단은 외교관으로 잘 알려진 임명진씨로 젊은 작가들과의 정신적 교감이 회원으로 자연스레 영입되기에 이른 것이다. 진익상은 전위 음악가로 참여한 이였다. 신전 동기의 정강자, 심선희는 강국진, 정찬승과 동기가 아닌 후배들이지만 이들 역시 실험적 열기에 공감, 자연스레 회원으로 참여한 것이었다.
청년작가연립전은 60년대 전반을 풍미한 추상표현주의의 포화상태를 적극적으로 벗어 나려는 젊은 세대의 현상타파의 공감대로서 이루어진 것으로 시대의 분수령을 만든 사건이었다. 이들 연립회는 전시 외에 세미나, 가두시위, 해프닝 개최등 다양한 행사등을 통해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적극적으로 체험하려고 하였다.<추상 이후 세계미술의 동향>이란 주제의 세미나는 전시가 열렸던 중앙공보관 영사실에서 열렸는데 연사로서는 이일, 김훈, 임명진씨가 초대되었다.
형의상관 새끼줄, 골판지
가두 시위는 전시가 열리는 첫날 무동인과 신전동인들이 중심이 되어 여러 구호를 적은 피켓을 들고 중앙공보관이 있던 소공동에서 출발 태평로, 광화문, 종로 , 을지로, 충무로, 명동을 도는 것으로 이루여 졌다. 피켓 행진은 일종의 미술의 사회 참여라는 시각에서 볼 수 있으나, 보다 적극적으로 미술제도에 대한 거센 항의의 형식으로 보는 것이 정확할 듯하다. 이들이 내건 피켓의 내용에서 이 점은 한결 두드러져 보인다. <좌상파 국전> <현대미술관이 없는 한국><행동하는 화가><추상이후의 작품>등은 국전을 중심으로한 권위주의적 미술구조를 신랄히 비판하는 내용으로, 현대미술관의 부재에 대한 언급은 문화정책의 빈곤을 직설적으로 비판한 것이었다.
행동하는 화가니. 추상이후의 작품이란 바로 이들이 지향하는 예술가로서의 자세와 동시에 현상에서 벗어난 새로운 모색의 담당자임을 강조한 대목이다. 그리고 전시 기간 중 전시장 일각에서 벌어진 해프닝은 전반적으로 이들이 지향하는 제스쳐로서 평가 되었다.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은 무동인, 신전 동인의 적극적인 요청에 의해 필자가 시나리오를 쓴 것으로, 비닐 우산으로 은유 되는 현대 물질 문영과, 정신의 상징으로서의 촛불을 대비시키고 마지막에는 비닐우산을 망가뜨리고 짓밟는 것으로 일종의 문명 비판 같은 내용을 담으려 했던 것이었다.해프닝이란 말은 해외잡지나 외신을 통해 간헐적으로 접해 왔으나 한국의 젊은 작가들에 의해 실현된 것은 처음이었다. 전시와 더불어 곧 화제거리가 된 해프닝은 단순한 흥미본위나 눈 길 끌기의 제스쳐라기 보다 현상을 타파하려는 치열한 의식의 한 편린이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듯하다. 해프닝이 화가들의 연극이라 불리어졌듯이 그것은 논리적으로 액션 페인팅의 한 발전적 변주 형식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며 전환적인 현상의 하나로 치부되어야 할 것이다.
청년작가연립전은 전시 내용서부터 가두시위, 해프닝 등으로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그것은 오랜 추상미술의 타성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많은 젊은 세대에 하나의 탈출구를 마련하는 신호탄이 되었다. 그것은 분명 한 시대를 마감하고 새 시대를 여는 기폭제로서의 의미를 띤 것이었다. 당시 연립전의 개개 작품을 나는 다 기억해내지 못한다. 오리진이 기하학적, 시각적 추상의 작품들로 비교적 통일이 되어 있었던 반면, 무 동인과 신전 동인은 네오 다다, 또는 누보 리얼리즘에 깊게 공감되는 작품군으로 채워진 기억 밖에 없다. 강국진은 병과 유리컵을 쌓아 올리는 작업 외에 비닐 속에 다시 비닐을 넣고 그곳에 색 물감을 오르내리게하는 작품을 출품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신전 동인들이 꾸민방 전체가 요즘의 설치 작품에 방불한 것으로 예술과 일상의 경계를 허문다는 메시지가 강하게 반영되었던 것 같다.
청년작가연립전은 1회로서 끝났지만 청년작가연립회라는 단체는(무동인, 신전동인만 참여)이후에도 몇 차례의 해프닝과 현대미술 강연회를 통해 활동을 지속하였다. 그러니까 청년작가연립회의 역할이란 67년에서 69년까지에 이르는 과도적 시기의 것이라 할 수 있으며 그만큼 전환적 의식이 높았던 것이었다.
국진의 활동은 몇 차례로 이어지는 해프닝의 적극적인 참여로 나타나고 있다. 68년 5월 세시봉 음악감상실에서 열린 <색 비닐의 향연>과, 같은 해 역시 같은 음악감상실에서의 <투명 풍선과 누드>그리고 역시 같은 해 10월 한강변 모래사장에서 있었던 <한강변의 타살>에 그는 직접 구성과 행위를 담당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때 그와 같이 행동을 같이 하는 이는 신전 동인의 정찬승, 정강자였다. 그러니깐 67년에서 68년 사이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도된 해프닝의 거의 대부분에 그가 참여하고 있는 셈이다. 해프닝은 이후 70년대에도 몇몇 개인이나 집단에 의해 꾸준하게 실현되었으나 초기적인 내용과는 많은 점에서 유형을 달리했다. 초기 해프닝은 문명 비판에서 현실 비판으로 이어진 것이어서 대단히 상황적인 요소가 강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미술작품의 연장이란 행동 방식에서 그들의 캔버스에 담을 수 없었던 문명 내지 현실 비판을 보다 직접적으로 표명할 수 있었다. 여기에 비한다면 70년대 해프닝은 잘 다듬어진 개념적 작업의 성향이 강한 편이었다.
강국진, 정찬승을 중심으로 전개된 해프닝의 초기적 현상이 갖는 현실 비판으로의 추이는 살벌한 당시 군사정권과 미묘하게 대치된 것으로 70년대 결성된 <제4집단>의 해프닝이 당국의 제재를 받기에 이른 것은 어쩔 수 없는 수순이었지 않나 생각된다. 강국진, 정찬승, 정강자 3인에 의해 구성되고 전개된 <한강변의 타살>에서 이미 제재의 손길이 느껴졌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한강변의 타살>은 한강변 모래사장에서 전개된 해프닝으로, 지금까지 줄 음악 감상실을 무대로 했던 장소를 열린 야외로 옮겨왔다는 점과, 기성 미술에 대한 강한 항의의 형식을 띠었다는 점에서 대조적이었다. 이들 고발의 대상으로 내세운 문화인의 유형은 사이비 작가, 문화 실명자, 문화 기피자, 문화 부정축재자(사이비 대가), 문화 보따리 장사(정치작가), 문화 곡예사(시대미학에 맹목적으로 편승하는 자)로 강국진, 정강자, 정찬승 3인이 모래 구덩이를 파고 자신들을 파 묻게 하므로서 이들 부정적 이미지의 예술가들을 장사 지내는 의식을 행했던 것이다.
1973년 입체 작품들을 중심으로 명동화랑에서 개인전을 열기까지의 몇 년간은 강국진의 연보에도 별다른 기록이 없다. 그의 개인 생활에 대해 구체적으로 아는 바 없다. 명동을 중심으로 상점가의 실내장치에 주력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떠 올릴 수 있을 뿐이다. 그가 다시 개인전을 통해 모습을 드러내기까지 2,3년 간은 청년작가연립전에 이은 69년 A.G의 창립과 그 활동으로 현대미술이 그 전환기를 벗어나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되어지고 있을 무렵이다.
전반적으로 개념예술, 미니멀리즘이 강하게 부상되고 있을 즈음이었다. 강국진의 개인전에 출품된 작품의 경향도 전체적으로 이 같은 시대의 미의식에 공감된 것이 아니었나 본다. <형의 상관>이란 부재가 붙은 이 개인전은, 청년작가연립전에서 보여준 실험적 의도가 늦춰지지 않은 채 더욱 자신으로 다져진 인상을 주었는데, 물질의 다양한 표정과 상황성의 가변을 내세운 개념적 작품권으로 채워져 있었다. 천, 로프 끝, 새끼줄, 골판지. 한지등 다소 거친 재료를 사용한 평면과 오브제들로, 물질이 갖는 고유한 질료와 그것들의 대비적인 관계항을 통한 여러 물리적 현상을 두드러지게 부각시켰던 작품들이었다.
그의 개념적인 작업은 73년 개인전을 전후로 한, 73, 74년 앙데팡당전 에서도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다. 한국미술협회가 주최하고 덕수궁의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앙데팡당전은 70년대 한국현대미술의 주요한 실험의 무대였다. 앙데팡당 정신이 일체의 심의를 거치지않는 자유로운 작품의 진열이라는 점에서도 앙데팡당전의 인기는 대단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 강국진의 작품으로는 일정 크기의 침목을 바닥에 세우고 그 위를 원으로 싼 다음 끈으로 다시 묶는 입체물 이었는데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물질과 상황의 독특한 관계항에 대한 그의 꾸준한 관심이 개인전과 앙데팡당전을 통해 지속 되어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 무렵 강 국진은 합정동 홍대입구 근처에 판화공방을 경영했는데 나도 이 판화 공방을 여러 차례 방문한 적이 있다. 판화 공방은 자신의 작업 외에 판화수업을 곁들인 것이었는데, 판화에 관심을 갖는 젊은 작가들이 많이 출입하고 있었다. 이 시대 그의 주변엔 정찬승, 김구림이 밀착되어 있었던 것으로 떠오른다.
강국진의 판화 작업은 73년 서울 예술화랑 초대전 이후 유화 작업과 병행 지속 되어었다. 판화를 통한 많은 해외전도 기록되는데, 미국 로스엔젤레스의 한미판화교류전, 한국판화유럽순회전, 한,중현대판화전 등이 그 대표적인 것으로 꼽을 수 있다. 74년경에 무 동인, 신전 동인 몇몇과 그 주변에 있었던 작가들이 다시 모여 무한대란 그룹을 결성 시키기도 했는데, 그 활동은 부진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어서 <서울 방법전>의 중심 작가로 작고할 때까지 관여한 것으로 알고 있다